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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Sep 20. 2019

오늘밤, 야생의 시간이 시작된다

자연과 인간의 심리적 거리 두기


캠핑장의 밤은 이 도드라지는 시간이다. 낮시간 동안 보이던 모든 것들이 칠흙처럼 어두운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대신 낯선 소리와 냄새, 촉감만이 그 자리에 남아 두려움을 만든다. 야만, 야생의 날 것들이 문명을 밀어내면 인간들은 안전한 각자의 굴 안으로 숨어들 수 밖에 없다. 본격적인 모험의 시간이지만 대개의 캠퍼들은 두려움에 떨며 잠을 청한다. 그리고 자연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이 밤새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한다. 이럴꺼면 우리는 여기까지 온 걸까.


이웃과 나의 거리, 인간과 자연의 거리. © 둔족추장


텐트와 텐트 사이의 적당한 거리
자연과 인간 사이의 심리적 거리  


밤의 캠핑장에서는 특별한 지형학적 심리가 작용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옆 텐트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도 이웃 텐트의 무리로부터 너무 떨어지지 않는 적당한 위치에 캠핑 사이트를 만든다. 최대한 이웃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도 야생으로부터의 공격에는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리를 선호하는 것이다. 이 심리의 기저에는 문명에 대한 혐오와 함께 야만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달리 말하면 야만에 대한 동경과 문명에 대한 그리움이 공존한다. 이 양가적인 감정이 나와 이웃 간의 최적의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속했다는 만족감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문명으로 달려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잠을 이룰 수 있는 캠핑의 본질과 닿아있다.


캠핑은 대부분 유사 자연이다. ('가짜 자연'은 어쩐지 너무한 것 같고 유사 자연쯤으로 해 두자). 왜냐면 캠핑이란 자연처럼 꾸며놓은 인공의 캠핑장 안에서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두어 달 머물다 가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캠핑장은 문명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온갖 편의를 제공한다. 매일 청소를 해주는 수세식 화장실, 언제든 온수가 콸콸 나오는 샤워장, 매점과 카페테리아, 세제와 수세미를 제공하는 개수대와 코인 세탁기까지! 무엇보다 돈만 내면 전기를 무한정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단지 텐트나 캠핑카에서 잠을 자는 곳일 뿐 문명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회의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도 역시 야만과 문명을 동시에 원하는 캠퍼들의 양가감정에 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다. 물론 백패킹 배낭 하나만 달랑 지고 오지에 짐을 풀어놓는 진정한 생존형 캠퍼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저쪽 산 너머의 불기둥을 보고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이 든다는 사실을 기억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의 캠핑장은 진짜 자연만큼이나 충분히 무섭다. 일단 어둠이 내리면 시각은 가려진 채 오로지 소리와 냄새, 촉각의 감각만이 남는다. 그런데 이 나머지 감각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보통 때와 다르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풀더미 뒤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부스럭거리는 소리, 갑자기 텐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숲을 울리는 이름 모를 벌레와 새소리, 누군가 눈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함, 소리, 소리, 소리들..! 어디 소리뿐인가. 갑자기 온몸을 엄습하는 추위, 새벽의 끈끈하고 습한 공기, 이끼와 흙과 나무가 만들어내는 숲 냄새... 그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생경한 느낌들은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라도 상상과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밤의 두려움을 잊기 위해 캠핑장에서 그렇게 무엇인가를 먹어대는가 보다. 미각을 극대화해 다른 감각을 둔화시키는 행위랄까. 밤새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도 알고 보면 혀가 하는 일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캠핑장에서 동물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밤의 아이. 오늘은 너의 자유로움을 허한다. © 둔족추장



야성을 가진 아이와 거리두기
위안과 안정을 주는 부모의 품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밤의 두려움이 어른들보다 덜하다. 오히려 그들은 빅 이벤트로 어둠 자체를 즐기기까지 한다. 랜턴을 끼고 그림자놀이를 하거나 텐트 밖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곤 한다. 낯선 것에 대한 수용의 한계치가 어른들보다 높아 보여 오히려 아이들로 인해 밤의 긴장이 풀리곤 했다. 그들의 따뜻한 체온과 두근두근하는 심장에 기대어 생각한다. 야만에 대한 두려움이 덜하다는 것은 그들이 혹 우리보다 자연에 더 가깝기 때문은 아닐까? 대개의 아이들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나름의 문화적 기준으로 한정된 현상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그들의 매직 타임에 초대받지 못하는 이유다. 밤이 되면 아이들은 부모가 규정한 인간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자연이 그들에게 선물한 야생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들은 쏟아지는 별빛 아래에서 인디언 추장을 잡아먹은 호랑이가 되기도 하고, 침낭 속에서는 신화에 나오는 곰이 되기도 한다.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불쑥불쑥 야성을 비춰 보이는 아이들이 두렵다. 활발한 활동력, 분주한 주의력, 본능에 충실한 욕구... 그럴 때마다 그들의 야성을 억누르고 제재를 가하기 바쁘다. 왠지 그들의 야성이 인간 세상에서 어울려 살아가기에는 불필요하거나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아이의 야성을 박탈하고 삭제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길들였다. 하지만 야성이 사라진 아이들은 자연에서 보여주었던 예민한 감각과 어떤 상황도 소화시키는 수용력, 집중력과 자기 주도성, 적응력까지 모두 박탈당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위험한 일은 하는 게 아니야라는 자기암시에 빠져 어떤 도전도 하지 않게 된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밤의 캠핑장에서 캠퍼들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처럼, 어쩌면 나도 아이와 나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야성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밝은 빛의 세계가 주는 안도감을 느끼게 만들 것. 나는 그들의 낮이요, 빛이요, 인간이자 문명으로서 자연과 야생, 야만의 세계에서 놀던 그들이 언제든 안심하고 쉬기 위해 뛰어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 그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고 다시 자기만의 야생에서 뛰어놀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곳, 그게 바로 부모의 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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