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멍때리기'가 유행한 적이 있다. 서울시는 심지어 2014년부터 멍때리기 대회를 개최 중인데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자 수가 늘고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다. 멍때리기란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멍때리기 대회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오래 유지한 사람에게 우승 트로피가 돌아간다. 바쁜 일상의 패턴에서 피로해진 현대인의 뇌를 잠시라도 쉬게 하자는 취지다. 멍때리기 대회의 번외 편으로 진행된 '다리 떨기 대회', '지우개 똥 만들기 대회'도 같은 맥락의 취지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이름도 웃긴 멍때리기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대회 우승자였던 초등학생이 사실은 엄청난 사교육의 중압감에 시달렸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되면서 멍 때리기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오직 성공만을 위해 질주하던 우리 사회 시스템의 부작용을 진단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해외 외신들도 취재해 갈 만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쉬지 않고 경쟁하는 사회에 대한 경종, 휴식 없는 삶에 대한 반성이 '워라벨'이라는 사회적 키워드로 번졌고, 그 바램이 결국 '주 52시간 근무제'로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멍때리기 대회 이전에도 우리 가족은 생활 속에서 수없이 멍 때리기를 실현하며 살아 왔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천근만근한 몸을 푹신한 소파에 던진 채 '무한도전'을 보며 멍을 때리고, 육아에 지친 주말 오후엔 애들 재우고 주말 드라마와 뉴스를 보며 멍을 때렸다. 아이들은 의미 없는 티브이 만화를 보며 멍을 때리고 부모인 우리들은 무료함을 달래려 핸드폰에 코를 박고 멍을 때린다. 거의 습관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 가족의 몸은 우리도 모르게 멍 때리기를 간절히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멍때리기란 여간해선 쉽지 않다. 멍 때리기를 위한 기술이라는 것이 오직 매스미디어와 디지털 기계에 기댄 '가짜 휴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형광 불빛이 명명하는 화면 속 가상현실은 잠시 피곤한 진짜 현실에서 벗어나 우리 뇌를 쉬게 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더욱 피로하게 만들 뿐이다. 쉬는 것은 축 늘어진 몸일 뿐, 뇌는 여전히 자극적인 화면과 활자의 공해, 정보의 홍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뇌의 활성이란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응일 뿐, 자발적이고 고차원적인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도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멍때리기 의식은 '불멍(불을 보며 멍 때리기)'이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집안이나 야외에서 장작을 태우며 나무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걸 즐겨왔다. 특히 멍 때릴 일이 잘 없는 현대사회에서는 불멍을 하기 위해 일부러 야외로 나가는 캠핑족이 늘고 있는데, 이들은 '캠핑의 꽃은 불을 피우는 것'이며 그중에서도 불멍을 캠핑의 가장 소중한 행위로 친다. 한 기사([ESC] 불멍, 한겨레, 김경훈)에 따르면 "이 행동이 얼마나 중독성이 있는지 최근 노르웨이 국영방송 <엔알케이>(NRK)는 장장 12시간 동안 장작불 타는 장면만 중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불멍의 역사는 '캠프파이어'라는 익숙한 용어로부터 거슬러올라가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 스와트크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영양의 뼈들을 분석한 결과('First campfire discovered in South Africa', <Discover Magazine>, 2005), 무려 160만 년 전부터 호모 에렉투스인들이 캠프파이어를 처음 만들어 즐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불멍의 즐거움은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인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에스키모인처럼 자연에 순응해 살아가는 인간들의 것이 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캠프파이어는 주로 영미권 학생이나 단체의 캠프 활동 중 하나로 발전해오다가 최근 가족 단위의 캠핑이 보편화되면서 식사와 불멍을 동시에 해결하는 작은 모닥불 형태로 정착하게 된다.
현대의 캠프 안에서 불멍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개 가족들이다. 존 업다이크는 '텔레비전은 원시시대의 불'이라고 설명했다. 거기엔 빛, 소리, 움직임 그리고 집중이 있다. 현대에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가족이 모여 앉듯이, 160만년 전에는 '불' 앞에 가족들이 모여 앉았을 것이다. 우리 가족도 해가 지면 모닥불 근처로 모여불빛이 만든 공동체 안에서 내밀한 담화를 나눈다. 재미있는 것은 점차 말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타오르는 불의 형상은 집중과 동시에 분산을 유도한다. 불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이게 하지만 동시에 각자 사고의 심연으로 여행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불은 우리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문이자 영혼의 안내자가 되어 각자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어보게 만든다. 마치 설거지를 하다 싱크대 창문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는 것처럼 우리의 눈은 의식을 넘어 무의식을 찾아 헤매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특히 불을 좋아한다. 무형의 형상이 주는 울림은 사고의 고정이 덜한 아이들에게서 보다 크게 작용한다. 아이들은 주의력 깊게 불을 응시하며 관찰하다가 점차 자신만의 의식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자발적 사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모닥불은 핸드폰 영상과는 다른 빛을 발한다. 따뜻하고, 냄새가 나고, 심지어 소리의 음이 진동으로 느껴지는 공감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관념적인 불이 아니라 체험하는 불이다. 꺼져가는 불을 장작을 넣어 살리기도 하고 장작이 숯이 되면 고구마를 넣어 구워 먹기도 한다. 아이들은 미디어의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주입식 자극에선 느끼지 못하는 감각을 경험한다. 그리고 주도적인 행동과 사고, 표현으로 그 감각에 자유롭게 반응하게 된다.
현대 뇌과학자들이 뇌의 휴지기 네트워크(DMN; Default Mod Network)를 통해 휴식과 창의성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불멍의 효용성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DMN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의 네트워크 상태로, 문제 해결을 위해 쉬지 않고 가동하던 뇌를 쉬게 했을 때 오히려 창의적으로 활성화되는 뇌의 특수한 영역을 말한다. 자연주의 사상가소로 역시 일찍이 그의 문제적 저서 <월든>에서 불을 응시하는 치유 행위에 관한 글을 쓴 바 있다. 소로는 황야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의 도덕성을 탐구했는데, 인간의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불태우는 행위로서 불멍의 필요성을 논했다.
우리 아이들 역시 불 앞에선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이 된다. 인디언들처럼 춤을 추고 에스키모인들처럼 불을 조절하고 활용한다. 아무것도 없는 원초의 상태에서, 아무런 문명의 이기가 없는 상태에서 불은 유일무이한 난방 도구이자,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조리 도구이며, 또한 소통과 사고, 유희를 가능하게 하는 대화 기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아빠와 엄마가 불 옆에서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사실에 환호한다. 물론 아이들이 불을 보며 멍 때리다가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불앞에서 몸과 마음이 나른하게 풀어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 불멍의 시간을 놓칠 수 없는 이유이다. 인류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불멍의 시간은 영원히 불멸의 시간으로 남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