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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Oct 28. 2019

프로사부작러의 야생놀거리

자연에서 손을 움직여 도구를 만드는 즐거움

누구나 어릴 적에 한 번쯤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뭇가지 젓가락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 같다. 가족과 함께한 등산길에서, 혹은 야유회에서 과도로 쓱쓱 나뭇가지 끝만 다듬어 만든 즉석 나무젓가락. 평소 못 보던 광경이라서인지, 아니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아버지의 시크한 손놀림이 위대해 보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때 그 젓가락으로 먹는 라면의 맛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신기함과 놀라움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아마도 도구를 직접 만드는 것에 대한 희열이지 않았나 싶다.


캠핑을 가게 되면 처음에는 누구나 먹고 자고 입는 것, 즉 의식주부터 해결하느라 열을 올린다. 우리 부부도 그랬다. 낯선 자연환경에 처음부터 맨몸으로 들어가기는 아무래도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이사를 는 것처럼 의식주와 관련된 캠핑 장비 일체를 구입해 완벽한 살림집을 구축한다. 말하자면 빙수기와 커피메이커, 미니냉장고와 화목난로, 선풍기와 모기장, 텔레비전과 오디오 시스템이 갖춰진 작은 별장을 자연 속으로 들고 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모든 편리한 생활 도구들이 정작 텐트 밖으로 나오려는 발목을 잡는다. '텐트 밖은 위험해. 이렇게 편한데 뭐하러 나가?' 안락한 도구들이 오히려 자연과 멀어지게 만들다니, 무엇 때문에 힘들게 자연 속으로 들어온 것인지 물음표가 생긴다. 잉은 결핍보다 못할 때가 있다. 네안데르탈인처럼.


호모 사피엔스가 라이벌인 네안데르탈인을 이기고 종족의 멸종을 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는가? 바로 도구를 만들어낼 줄 알았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키도 작고 힘도 세지 못했다. 게다가 뇌의 용량마저 적었다. 한 마디로 핸디캡이 많은 종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DNA를 탓하거나 열등감에 빠져 술이나 마시며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는데, 그 의지의 힘이 결국 종족을 살리게 된다. 힘이 약해 육탄전에 능하지 못했던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을 상대하려면 원거리에서 창을 던져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고 멀리 창을 던지기에는 역시 힘이 모자랐기에 그들은 결국 회전력과 원심력의 원리를 이용한 창 던지는 도구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바로 투창기 '아틀라틀'이다. 아틀라틀은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 되도록 도와준 도구 중 하나가 된다.



호모 사피엔스의 핸디캡은 뛰어난 사냥도구 '아틀라틀'을 만들게 했다. 결핍이 없다면 도전도 없다. 만약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처럼 힘이 세고 키도 컷다면 과연 아틀라틀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자기 힘만 믿고 나태해진 네안데르탈인처럼 우리 부부는 어느 순간 너무 많은 장비 속에 둘러싸여 먹고 자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안락함을 주는 장비는 오히려 자연과 멀어지게 만들고, 자연이 던져주는 재료로 야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고자 하는 의지를 꺾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깎아준 나뭇가지 젓가락에서 느꼈던 야생의 해방감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캠핑 업체 사장님들껜 죄송하지만, 어쨌든 우리 가족은 기존의 캠핑 장비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필요한 캠핑 도구를 즉석에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만들다 보니 또 이만큼 재밌는 유희 활동도 없다.


우리가 만든 주방도구들, 처음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어본 숟가락 © 둔족추장



과잉과잉한 캠핑 장비는 오히려 놀 줄 모르게 만들어  
자연물로 직접 나만의 캠핑 도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텐트부터 만들자니 너무 엄청난 작업이 될 것 같아 우선은 아주 작은 생활 소품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는 달랑 칼 한 자루.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우드카빙(wood carving)에 도전한 것이다. 워낙 이렇게 꼼질꼼질 사부작거리는 걸 좋아하는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숟가락과 젓가락 같은 부엌살림부터 만들었다. 숟가락은 인체공학적인 심미안을 가동해 오랫동안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공을 들여야 웬만큼 쓸 만한 물건을 만들 수 있다. 젓가락이야 뭐 부러진 나뭇가지 두 개를 찾아 끝만 조금 먹기 좋게 다듬어 주면 된다. 이런 취미는 사실 자연에 나가 만드는 것이 적합하다. 집안에서 사포질을 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니까.


의 실험은 좀 더 과감해져서 급기야 인디언 헹어와 주전자 걸이, 파이어 리플렉터(fire reflector)까지 만들기에 이른다. 남편은 워낙에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손재주도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사부작거리며 노는 우리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도 역시 크래프터의 본능이 생겨났는지, 아니면 혼자 끙끙거리는 마누라가 딱했던지 드디어 손을 놀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칼 한 자루가 다였던 날붙이 연장들이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났다. 남편이 주변에 잘리거나 꺾어진 나무 재료들을 모아 와 도끼와 톱으로 잘라주면 내가 칼과 사포로 다듬고 연마하는 식으로 분업이 이뤄졌다. 깎고 버려진 것들은 모두 불쏘시개 용으로 쓰인다.


우리가 부엌살림에 공을 들이며 노는 동안 아이들은 숲 속의 요정이 되어 밥상을 차리며 논다. 쭉정이 밤으로 만든 숟가락과 나뭇가지 젓가락을 만들고, 나뭇잎과 꽃잎, 열매와 뿌리들로 만든 음식들 함께 너른 바위 밥상에 놓으면 완성. 꼭 연장이 있어야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첫째 건이는 돌멩이와 가죽끈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건 채 상수리 나뭇잎으로 만든 인디언 모자를 쓰며 뛰어다니고, 둘째 호야는 화관을 쓰고 나뭇가지 인형을 만들어 논다. 커다란 천과 노끈으로 그들만의 작은 텐트를 만들어주니 비밀의 공간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아이들을 위해 새총을 만들어주자 자기들이 과녘을 만들어 논다. 아이디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낳고 꼬리에 꼬리를 문 놀이가 저녁이 되도록 이어졌다. 텔레비전도, 드폰도 없었지만 오랜만에 모두가 즐거웠다.


프로사부작러들의 야생놀이터 © 둔족추장


손보다는 머리를 쓰는 것에 더 익숙한 아이들
발도르프 교육처럼 '손육아'를 해보는 건 어떨까


세상에 놀 것은 무궁무진하다. 특히 아무것도 없는 자연 안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어 만들기에 집중할 수 있다. 전인교육의 산실인 독일의 발도르프학교에선 특별히 아이들을 위한 교육 중에 '목공' 과목을 필수로 가르치기도 한다. '손'을 쓰는 교육이 아이들에게 특히 더 필요하다는 취지다. 목공이 집중력 향상은 물론 창의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됐지만, 어떤 공교육과 학원도 목공을 아이들의 커리큘럼에 넣지 않는다. 시간에 쫓겨, 아니면 편리를 좇아 손보다는 머리를 쓰는 것에 더 익숙한 아이들. '책육아'는 있으면서 '손육아'는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은 밖으로 나온 뇌'. 엠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목재와 연장이 직접 손끝에 와 닿아 느껴지는 감각은 그 즉시 뇌로 연결돼 뉴런을 건드린다. 아이는 하얀 도화지와 같은 나무토막(blank)에 자신의 무한한 상상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공간감과 수학적 논리를 총동원해 실현 가능한 대상을 정하고, 계측하며, 깎아내고, 수정한다. 그리고 점점 실체가 드러나는 대상에 희열을 느낀다. 이 모든 과정은 직접적으로 뇌의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유튜브로 보는 만들기와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다. 아무리 애플의 아이패드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더라고 끝내 종이책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호야는 아직도 한글에 관심이 없고, 당장 몇 개월 뒤 초등학생이 되는 건이는 글씨가 개발새발이다. 하지만 우린 이번 주말에도 또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저녁 늦게까지 숙제를 하고, 주말에는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원에 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참 한심한 수준의 교육을 하고 있는 셈일까. 남보다 더 뛰어나기 위해, 아니면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아이들은 매일 경쟁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경쟁에서 이긴 들 과연 만족할 수 있을까? 살아 보니 다른 이와의 경쟁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경험이 사는 데 더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어른이 만족하는 삶이 아닌 아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


앞으로는 재료를 보다 다양하게 확장해서 노끈이나 털실, 풀 등을 활용한 직물이나 가죽공예도 아이들과 함께 해보려고 한다. 무엇이든 그들의 손을 기쁘고 기운차게 움직여주는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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