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취미는 '낚시'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나를 끌고 낚시를 다니더니, 이제는 자식들을 끌고 다닌다. 건이가 3살이 갓 되었을 무렵부터 함께 다녔으니 건이의 낚시 경력도 4년이 다 되어가는 셈이다.남편이 좋아하는 낚시는 바다낚시인데, 오로지 생선회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직접 잡은 생선을 날로 먹는 기쁨을 느끼고 처자식의 배를 직접 잡은 물고기로 채우는 뿌듯함을 느끼기 위해 그는 날만 좋으면 바다로 떠난다. '낚시가 밥 먹여주냐?'라는 내 잔소리를 뒤통수로 반사시키고, 우리나라가 삼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래서 우리 가족 캠핑의 목적지는 대개 바다 근처였다.
나도 처음에는 낚시에 동참하곤 했다. 하지만 아내가 뽑은 최악의 남편 취미 1위가 낚시라고 했던가. 왜 낚시가 게임을 제치고 1위를 했는지 나는 잘 안다. 게임은 같이 할 수라도 있지 낚시는 도저히 부부가 함께할 수 없는 고통의 취미다. 나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같은 자세로 입질을 기다려야 하는 괴로움과 어린 둘째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점점 낚시의 세계에서 멀어졌다. 그러는 사이 건이가 먼저 나 대신 아빠 곁을 지키며 열렬한 낚시교 신자가 되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호야조차 아빠와 오빠를 따라 낚시를 즐긴다. 엉덩이가 새털처럼 가벼운 7살, 5살 아이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혹은 엄동설한에도 꼼짝하지 않고 입질을 기다리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들이 단지 수렵의 '재미' 때문에 낚시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손맛'이라고 불리는 짜릿한 감각의 재미 말이다. 물고기가 미끼를 건드리고, 바늘을 물고, 퍼덕이고, 당기는 입질의 과정은 오로지 가느다란 낚싯줄과 낚싯대의 감각으로 느껴지는데, 바로 그 지점에 낚시의 재미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수렵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대상을 잡아서 '먹는 것'이 입질의 '재미'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잡아서 먹는 일을 성공했을 때의 뿌듯하고 안정된 감정을 탐한다. 낚시를 단지 게임이나 유희가 아닌 본능과 생존의 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진지한 사냥꾼'이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캠퍼들이 접근할 수 있는 최선의 수렵 영역은 낚시와 해루질까지일 것이다. 국내 실정상 총이나 활, 다른 동물들을 이용한 사냥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뒤 법적 허가를 받아야 하고, 작살이나 덫같은 도구는 법적으로 금하고 있다. 낚시나 해루질도 금어기를 지켜야 하고 허용된 지역에서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진지한 사냥꾼'들이 활동하기에는 비교적 제약이 많은 환경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캠퍼들이 '수렵'의 영역에 도전한다.
진화된 심리기제가 인간 행동을 만든다는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우리 가족의 수렵 본능도 대충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생존과 번식에 적합하도록 진화된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 헤매게끔 하는 거라면?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가 비만, 성인병, 스트레스 등 현대산업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자연 속으로 들어가 신선한 식품을 선택하도록 하는 건 아닐까.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농업혁명이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한다. 수렵채집인은 수십 종의 먹을거리에 의지해 생존했기 때문에 저장해둔 식량 없이도 어려운 시절을 몇 해라도 견뎌낼 수 있었다. 반면, 농업인들은 오직 몇 가지 주식 작물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섭취하는 영양 면에서 취약했고,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말하자면 수렵채집인의 식생활이 농업인의 것보다 훨씬 다양하고 융통성이 있었기 때문에 진화 과정에서 더 선택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여러 캠퍼들이 현대에 와서도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쨌든 나는 내 가족의 수렵활동을 막을 이유도, 방도도 생각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직접 잡아먹는 이 본능적인 쾌락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수많은 캠핑 활동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수렵을 택하겠다. 이것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본능에 충실하며, 야생의 원리에 적합한 활동을 보지 못했으니까. 아이들은 무엇이 가장 흥미진진한지 귀신같이 눈치챈다. 그들을 자극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스스로 사냥을 하는 동물이라는 본능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의 본능에 응답하는데 우리 어른들은?
나는 얼마 전 육아 앞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인 남편을 향해'중년이 되면 야성을 가져야 한다'라고 일갈했다. 이상하다. 아줌마가 되면 자식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없던 야성도 생겨나던데 남편은 직장에 야성을 두고 오나보다. 직장을 정글에 비유하는 걸 보면 그도 꽤나 야성적인 것 같은데 왜 집에만 돌아오면 집오리처럼 구는지. 아마도 내가 자꾸 남편과 아이들을 야생으로 내모는 이유가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야성을 좀 보여달라고. 다행히도 남편은 낚싯대만 잡으면 세상 야성적인 남자로 변신한다. 뭐라도 잡아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 것이 유일한 낛인 어미새처럼.
야망을 가지기엔 너무 많은 걸 가진 나이라는 걸,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세상이 다 안다. 하지만 적어도 야성만은 잃진 말았으면 한다. 갈리고 닦여져 세련되어지더라도 그 대가로 야성을 내어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나이쯤 되면 큰 배를 타고 나가 대어를 낚겠다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대신 하루 종일 해안가에서 구멍치기라도 하며 작은 물고기를 잡아 자식 입에 넣어주는 기쁨을 택한다. 중년의 야성은 그런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 남자의 취미가 왜 낚시가 되었는지, 그가 왜 아이들과의 낚시를 아끼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