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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둔족추장 Nov 10. 2019

텐트의 틈 사이로 허밍이 들리면

콧소리와 휘파람이 만들어낸 자연의 음악  


'요이킹'은 라플란드의 소수민족인 사미족이 즐겨 부르는 민요이다. 나직하고 구슬픈 가락이 특징인 이 노래는 특이하게도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다. 오직 흥얼거리는 듯한 허밍뿐인데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내용이 모두 그려진다. 가령 '어미 순록이 늑대를 만났을 때'라는 제목의 요이킹은 새끼를 두고 세상을 마감해야 하는 어미의 참담함이 느껴져 눈물을 떨구게 만든다. 하지만 허름한 유목민 텐트 속에서 애조 띤 요이킹을 부르던 사미족의 마지막 후예를 보며, 이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도 언젠가는 결국 사라지고 말겠구나 라는 안타까움이 남았다. 그러면서 나 역시 어릴 적 엄마품에서 들었던 자장가 이후로는 어떤 이의 밍을 들어본 적이 꽤나 오래됐구나 라는 자각도 함께 몰려왔다.


캠핑장에서는 그날의 흥을 돋우기 위해 음악을 즐겨 듣는다. 최근 유행하는 최신가요나 듣기 편한 경음악이 대부분이고, 가끔 취향이 독특한 캠퍼들이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안내를 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누구도 직접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 없다. 각자 좋아하는 음악의 스펙트럼은 그토록 다양한데 정작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니. 우리는 언제부터 노래하기를 그만둔 걸까?


부끄럽거나 멋쩍은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옆 텐트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예절 때문이라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도 충분히 잘 들린다. 캠핑장에서 적당한 음악은 죄가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정작 노래는 못 불렀던 이유는 뭘까.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노래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다행히 아직까지흥이 나면 노래 부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게 나 역시 만약 다른 이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허밍 정도라면, 지금이라도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불러 볼 수 있까.


아이들은 자연의 소리에 항상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노래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  © 둔족추장



허밍과 휘파람, 악기로 표현하는 즐거움
자연의 소리로 만든 악보로 버스킹 공연을


건이는 최근 들어 휘파람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입을 달싹이며 휘파람을 불 만한 발달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녀석은 자신이 혀와 입술의 모양으로 음의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갖게 된 것에 새삼 감동한 모양이다. 그 감동을 더 느껴보라고 예전에 친정엄마가 사주셨던 팬플룻을 꺼냈다. 엄마도 내가 건이 만할 때쯤, 아마도 내가 휘파람을 처음 불기 시작했을 무렵 팬플룻을 사주셨을 것이다. 서툴지만 불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그리만약 우리가 숲에서 악기를 함께 연주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상상을 해봤다.


아들내미의 노력에 감명받아 나 역시 오래전에 그만둔 기타를 꺼내 조율을 해본다. 케이스에 쌓인 먼지만큼 손끝의 감각도 둔하다. 엄마가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기타를 뚱땅거리는 모습을 보더니 호야신기하고 이상한 듯 옆에서 씩 웃는다. 그러더니 유치원에서 받아 온 마라카스를 가져와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브레멘 음악대가 된 것 같다. "건이는 팬플룻, 엄마는 기타, 호야는 마라카스를 들고 이대로 숲으로 나가 보지 않을래? 아빠는 나무토막 실로폰과 그루터기 북을 맞기자."


우리는 다른 캠퍼와 동물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노지로 나가 텐트를 쳤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무렵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나직한 톤의 요이킹처럼 한없이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변에서 들리던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를 따라 해 봤다. 뻐꾸기, 종달새, 소쩍새, 찌르레기, 여치, 매미... 그리고 바람이 부는 소리,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눈 밟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등을 흉내 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소리의 강약과 박자, 분위기와 선율을 바꿔가며 점점 자기만의 악보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머릿속 악보를 떠올리며 각자의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다. 한 사람씩, 그리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모두 다 같이. 라이브 버스킹이 별 건가? 모두 이렇게 시작하는 거지.


 

소년의 휘파람에 콧소리로 응답하던 저녁 © 둔족추장


우리는 언제부터 노래하기를 그만둔 걸까?
흥과 한을 나만의 소리로 표현하는 문화 필요해


우리 민족만큼 흥과 한이 많은 민족도 없을 것이다. 잔칫날에는 마당 한가운데서 모두가 장단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새참 먹는 들녘에서도 고된 노동과 가난의 한을 구슬픈 민요로 풀었다. 구전 민요의 대부분이 작자미상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일상 자체가 음악이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흥과 한이 음악으로 자동 연결되던 정서의 고리가 어느 순간부터 고장나버리고 만다. 다양한 서구 문물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 권역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라플란드의 소수민족처럼 가진 게 많아졌지만 영혼을 잃어버렸다. 음악의 바닷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듣고 배우는 것에 급급하고 만족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타고난 흥부자들이다. 살면서 한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옛사람들처럼 자신의 흥과 한을 음악으로 표현할 줄 알게 되면 참 좋겠다 라는 바람이 생긴다. 왜냐면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했으니까. 흥이 뻗치면 발을 마구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지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러우니 그만두라는 핀잔뿐이었다. 한이 생기면 가라앉는 마음과 분노를 표현할 길이 없어 목구멍 깊숙이 삼킬 수밖엔 없었다. 나의 아이들은 그러지 않길 바란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마음의 악보를 노래와 연주로 표현해보라고. 그래서 그 과정에서 솟아나는 희열과 희망을 느껴보라고.  


자연은 문명을 버리고 가는 곳이다. 만들어진 음악이 아닌 나만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기회다. 자연음을 듣고 그 음의 아름다움과 삶의 감동을 다시 자기만의 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곳.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고, 바이올린을 쥐어준 들 자신만의 소리를 알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흥과 한을 음악으로 표현할 줄 아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자연이 아닌 어떤 곳에서라도 감정을 조절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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