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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Oct 14. 2019

약도 없는 장비병엔 미니멀캠핑

중요한 건 생존이지 장비가 아니야


"오늘 또 무엇인가를 질러버렸다."

"제3의 인격이 더 좋은 장비를 사라며 속삭인다."

"기변(기계변경)의 개미지옥에 빠졌다."

"내가 못하는 이유는 장비 때문이다. 장비를 바꾸면... 장비를 바꾸면...."


 '장비병'에 걸린 사람들이 흔히 겪는 증상들이다.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거늘 꼭 어가 장비 탓을 한다. 하지만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이랄까. 어느 분야의 취미든 장비병은 피해 갈 수 없는 복병처럼 다가와 우리의 주머니를 야금야금 털어간다. 그리고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거나 부질없다 느껴질 때쯤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아.. 이게 바로 장비병이구나."


캠핑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텐트에서부터 자잘한 생활 도구들과 갬성갬성한 소품들까지 어마어마한 카테고리의 캠핑 장비들이 초보 캠퍼의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그럴 만도 한 게 캠핑이란 것 자체가 삶의 터전을 도시에서 자연으로 축소해 옮겨오는 것이니 생활 전반에 걸쳐 준비할 게 많기도 다. 문제는 초기 진입장벽만 높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건을 사용하면 할수록 하이 테크트리를 타며 더 좋은 장비로 갈아타고 싶어 진다. 본격적인 장비병의 시작이다.


캠핑에서 더 좋은 장비란 더 살기 편한 장비를 말한다. 오토캠핑의 예를 든다면, 보통은 전실이 없는 작은 규모의 텐트에서 시작해 가족 수나 살림이 늘게 되면 넓은 전실이 있는 대형 텐트로 기변하게 된다. 그러다 대형 텐트를 치고 접는 것마저 귀찮게 되면 달구지 스타일의 트레일러로 넘어가다가 결국 모든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진 모터홈(캠핑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게 일반적인 수순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모터홈 사용자들 중에는 다시 텐트 생활로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도 아주 미니멀한 형태로. 멕시멀 캠핑의 끝에 가 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격한 일까?


장비는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장비병에 밀려버린 캠핑의 본질
최소한의 장비로 생존하는 부쉬 크래프트


남편과 나는 언젠가 아이들이 제법 크고 나면 둘이서만 함께 백패킹을 가자며 벼르고 있다. 배낭 하나만 달랑 진 채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자연과 하나 되는 로망을 안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멕시멀하다. 오늘도 나는 동계캠핑 준비를 위해 새로운 방한 캠핑 용품들을 또 질러버렸다. 이미 있는 장비는 왠지 허술해 보이고, 더 좋은 장비를 갖추면 고생을 좀 덜 할 것 같아서다. 어린 자식들 때문이라고 옹색한 자위를 하지만, 왠지 개운하지 못한 건 기분 탓이 아니다. 과잉에서 벗어나 최소를 지향하며 여기까지 왔건만 다시 과잉의 시작이라니. 괜한 자괴감을 느끼면서도 구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은 말릴 수 없다. 이쯤 되면 캠핑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미니멀캠핑의 끝에는 이른바 '생존 캠퍼'들이 있다.  <Man vs. Wild>에 나오는 베어 그릴스 정도의 생존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장비를 가지고 자연 속에서 '부쉬 크래프트(Bush Craft)'를 즐기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나이프, 손도끼, 톱 등 기본적인 만들기 도구들로 직접 숲의 자연물을 이용해 움막 생활도구를 만든다. 부쉬 크래프트의 보다 넓은 의미 '오지의 생활방식'쯤 될 것이다.  그들이 맨 배낭 안에는 오직 작은 타프와 로프, 침낭, 물통, 간단한 조리도구와 식량 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이들은 마치 원시인처럼 부싯돌을 사용해 직접 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하고, 야생의 먹잇감을 찾아 조리하거나 날 것으로 먹는다.


부쉬 크래프트가 일반적인 백패킹과 다른 점이라면 서바이벌(survival)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들은 캠핑 시장의 고가 의류나 유명 장비와는 거리가 멀다. 자연 속에서 직접 필요한 것을 구하고 만들어 캠핑을 즐긴다. (하지만 실제 재난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서바이벌과는 달리 자연물을 이용해 직접 의식주를 해결하며 '즐기는' 아웃도어 레포츠라는 점에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들의 목표는 최소한의 도구로 최대한의 자연을 즐기는 것이다. 물, 불, 흙, 쇠, 공기라는 자연의 5대 원소가 그들의 유일한 도구다.


소수의 캠퍼들만이 즐기는 부쉬 크래프트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로 '최소한의 도구'만으로도 자연에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자 그 모든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유희의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덴마크의 유명한 대장장이 부쉬맨 © Rune Malte Bertram-Nielsen Youtube



사치에서 벗어나 사치의 늪으로
필요한 건 장비가 아닌 생존의 원칙




SURVIVAL : 살아남는 8개 원칙


Size up the situation : 우선 상황을 적절히 파악할 것

Under baste makes waste : 절대로 서둘지 말 것

Remamber where you are : 현재 지점을 확인할 것

Vanquish fear and panic : 어떤 일에도 겁먹지 말 것

Improve : 창의성을 발휘할 것

Value living : 생명을 소중히 할 것

Act like the natives : 현지에 적응하는 행위를 할 것

Learn basic skils : 기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하고 행동할 것



원칙이 있다면 최소한의 도구만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원칙이 비단 캠핑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재밌다. 일상의 사람살이에서도 적용되는 원칙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생존이고 기적이다. 아이들이 엄마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까지 매 순간이 참으로 극적이다. 영화 <엑시트>에 나온 대사처럼 지금 현재가 '재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평소 주변의 위험이나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연이 아닌 도시의 한 복판에서도, 안락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집안에서조차 생존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원칙이 없으므로 위기에선 언제나 물질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농경사회에 접어들며 '사치의 덫'에 빠졌다고 말한다. 좀 더 쉬운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치품이 필수품이 되는 시대에서, 일단 사치에 길들여지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 중 상당수는 돈을 많이 벌어 35세에 은퇴해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유수 회사들에 들어가 힘들게 일한다. 하지만 막상 그 나이가 되면 거액의 주택융자, 학교에 다니는 자녀, 적어도 두 대의 차가 있어야 하는 교외의 집, 정말 좋은 와인과 멋진 해외 휴가가 없다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들이 뭘 어떻게 할까? 뿌리채소나 캐는 삶으로 돌아갈까? 이들은 노력을 배가해서 노예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아이와 만들어본 자연물 장난감. 아이들은 언제든 가볍게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 둔족추장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는 과연 그래서 더 여유롭고 느긋해졌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모든 문명이 사라지게 되어 자연 속에 홀로 서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암울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들에 가야 할 인류의 유산은 생존을 위한 장비가 아닌 생존을 위한 원칙, 즉 '살아남는 법'이 되어야 한다.


돌아보면 취미도 장비발, 글쓰기도 장비발, 결혼도 장비발, 요리도 장비발, 심지어 육아도 장비발이었다. 도무지 깊은 본질로 들어가볼 용기는 내지 못하고 장비만 모으다 끝난 인생의 목표가 대체 몇 개란 말인가.


장비발로 점철된 지난 날을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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