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우리 가족은 위험의 한가운데 있었다. 겁도 없이 태풍이 지나가는 길목에 진을 치고 우중 캠핑에 도전한 것이다. 저녁때까지는 모든 것이 좋았다. 살짝 흐린 하늘, 아름다운 바다 풍경, 멋진 노을까지! 그림도 그리고 모래놀이도 하고 낚시도 하고 주꾸미도 구워 먹으며 각자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밤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강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웽강뎅강 난리가 났다. 텐트를 감싸고 있던 천막은 날아갈 듯 펄럭이고 맹렬하게 바다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캠핑장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우리는 황급히 가재도구들을 천막 안으로 들였을 뿐이었지만, 다른 캠퍼들은 아예 텐트를 걷고 차에 올라타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참으로 황망한 순간이었다.
부모가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자 아이들도 점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천막 안에 모여 가족회의를 열었다. 남편은 지금이라도 천막을 걷고 텐트에서 잠을 자다가 유사시에 바로 차로 달려가자고 제의했다. 텐트는 금방 해체 가능하니 천막을 걷는 시간을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천막이 바람을 막아주고 텐트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니 이대로 아침까지 버텨보자는 쪽이었다. 태풍의 절정이 아직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우리의 의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바람은 점점 더 세져서 텐트에 달아놓은 전등이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건이가 일어나 말했다. "엄마, 천막을 좀 더 꼭 묶어야겠어요." 이 말에 우리 부부는 정신이 번쩍 들어 천막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얕은 깊이의 펙으로 밖아 놓은 데다 몇몇은 작은 돌에 감아놓았을 뿐인 엉성한 모습에 공포감이 확 몰려왔다. 그것을 보고 아이는 '모래주머니'를 만들어 달자고 제안했다. 하기사 사방에 널린 게 모래였고 우리에겐 여분의 봉지가 충분했으니까. 아이와 나는 서둘러 해변으로 달려가 커다란 비닐봉지에 종이컵으로 모래를 퍼다 담았다. 꽤 묵직해지자 아이는 온몸을 휘며 모래주머니를 끌었다. 나는 아이를 도와 펙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마지막 점검을 마친 뒤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의 얼굴을 다시 돌아본 건 한참 뒤였다. 어 그런데 평소의 내 아들이 아닌데? 위험 앞에서 항상 내 뒤에 숨거나 누군가 해결해주길 바라던 모습은 사라지고, 왠지 긴장되면서도 자신이 한 대응에 뿌듯해하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진지를 방어했고, 이제 맹공을 시작할 바람으로부터 우리의 멘털만 잘 챙기면 되는 거였다. 건이에게 처음으로 '진인사대천명'을 가르쳐주었던그날 밤 결국 바람이 더 거세져서 새벽에 철수를 할 수 밖엔 없었지만, 우리에겐 위기를 함께 넘긴 동지애와 왠지 모를 자신감이 남았다.
'담력(膽力)'이라는 기운이 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인생살이에 중요한 덕목이냐면,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성인이 되기 전의 아이들에게 '담력테스트'를 해왔다. 이 테스트를 통과하고 담력을 갖춰야만 완전한 성인으로서 대우해 주겠다는 의미이다. 담력테스트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번지점프'다. 발목에 로프 하나만 매고 높은 절벽이나 다리 위에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그야말로 목숨 건 점프 말이다. 번지점프는 원래 뉴질랜드 바누아트공화국 원시부족민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뉴질랜드의 아이들은 이 위험천만한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번지'라는 넝쿨이나 나무줄기로 엮은 줄을 두 다리에 묶고 높은 나무 탑에서 뛰어내리는 모험을 감행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성인식을 통해 담력과 강력한 도전심을 키울 수 있다고 믿었다.
위험이 없다면 담력도 없다.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가 바로 담력이기 때문이다. 이 담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은 일상에서 크고 작은 위험을 만나고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더 큰 위험에 올바로 대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 때때로 자신을 시험하고 담력을 키울 수 있는 일상의 위험이 충분한가? 바누아트족의 어른들처럼 우리 아이들에게 크고작은 위험을 선물해줄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담력 또한 충분할까?
사실 건이가 모래주머니를 제안했을 때 나는 솔직히 모든 걸 포기하고 철수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컷다는 걸 고백한다. 왜냐면 자식이 위험 앞에 서게 되는 것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당장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아이들을 피신시켜 내 마음이 안정되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하지만 아이의 상기된 표정에서 도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너무나 느껴졌기에 내 두려움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살려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면 살 것이다(必生卽死, 必死卽生)'. 건이가 용기를 내지 못할 때마다 해줬던 말이다. 바누아트족의 아이들은 죽을 각오로 용기를 냈기 때문에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나 역시 죽을 각오로 아이를 위험 속에 놔주어야만 아이는 그만의 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번지점프는 사실 부모의 담력 테스트와도 같다.
위험하지 않은 놀이터는 오히려 아이에게 위험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작게 자주 다쳐야 크게 안 다친다'라는 말도 있으니까. 평소 위험과 만나거나 위험을 다루는 것을 익히지 못한 아이는 더 큰 위험 앞에 놓였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없을 것이다. 늘 위험 앞에 제지당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겐 학습된 무기력과 자발적 복종이 생겨난다. 이런 폐해는 이미 세월호 사건으로 확인된 바 있다. 침몰의 위험을 인지한 상황에서도 탈출을 시도하기보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지키다 죽음을 맞은 아이들. 이들이 세월호를 타기 전 작은 위험부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성장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세월호의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에게 항상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라'라고 가르친다. 강박이어도 좋다. 실제로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부모로서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구명함을 선물한 셈일 테니.
부모들은 안전장치가 완벽하게 설치된 키즈카페, 정글짐이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에 우레탄이 깔린 놀이터를 선호한다. 이런 공간이 아이들에게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 키즈카페에서는 미세먼지가 아이들의 폐를 공격하고, 우레탄 바닥은 환경호르몬이 아이들의 건강을 위협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바로 그곳이 '너무나 안전하다'는 사실이다. 안전장치가 달린 놀이터는 아이들이 위험을 사전에 인지하고 방어하며 대처할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곳엔 어떤 '위험'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경우, 그런 곳은 언제나 '따분해'했다.
자연에서 아이들은 '위험한' 웅덩이를 뛰어넘고, '위험한' 나무에서 뛰어내리고, '위험한' 물가에서 돌을 던진다. 아이들은 온전히 위험을 즐기고, 견디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다. 놀이터는 기본적으로 아이들만의 공간이어야 한다. '위험해!' '안돼!' '하지 마!'라고 외치는 부모와 교사의 간섭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곳에서 자잘한 위험과 마주하고 그 위험을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며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시의 놀이터는 그 모든 위험이 거세되어 있다.
오늘도 나는 밤송이가 가득 떨어진 유치원 뒷뜰에 아이들을 풀어놓았다. 그들은 미친 듯이 밤송이를 찾아 헤매고 까고 찔린다. 건이는 이제 밤송이 가시에 찔리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미 수도 없이 많이 찔려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째 호야는 밤송이에 찔려 울고불고 난리다. 처음 찔려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