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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령 Oct 23. 2019

흔적 말고 마음만 두고 떠나 주세요

느리고 지속가능한 그린캠핑을 위하여  


러시아의 사냥꾼들은 겨울 사냥철이 되면 숲에 머무는 동안 작은 움막과 간이 음식 저장고를 만든다. 그리고 그 움막에 지내면서 먼저 다녀간 사냥꾼이 놓고 간 소금, 빵, 땔감 등으로 먹고살다가, 사냥이 끝나면 자신이 가져온 것들을 남겨두고 떠난다. 다음에 그곳에 올 사냥꾼을 위한 배려이다. 그들이 혹한기에도 사냥을 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남겨두는 것은 오직 지저분한 흔적(trace)뿐이지 않은가.


들살이 숲살이 캠핑 생활을 하면서 처음엔 일회용품을 주로 사용했다. 간편했기 때문이다. 2천 원짜리 일회용 다이소 철판을 사서 스티로폼 용기에 포장된 고기와 야채를 굽고, 아이들에겐 쓰고 바로 버리기 쉬운 플라스틱 그릇과 포크를 쥐어주었다. 설거지를 할 것 없 깡그리 모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캠핑장에서 나눠주는 재활용 봉투엔 각종 비닐과 플라스틱 용기, 종이컵, 음료수 캔들과 술병들이 가득 쌓이고, 마치 배설하듯 뱉어낸 쓰레기만 우리가 떠난 자리에 남았다. 하루치 즐거움을 위해 생산된 쓰레기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캠핑장을 떠날 때마다 뭔가 놓고 오면 안 될 것들을 놓고 오는 느낌에 마음이 아렸다.


캠핑장이 아닌 노지에서 캠핑을 할 때는 이런 불편한 감정이 배가 된다. 캠핑장처럼 분리수거장도 없는 노지 여기저기에는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다. 이곳을 다녀간 캠퍼들의 흔적을 보며 자연에서 느낄 수 있는 청량감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옛 말에 '동물이 지나간 자리는 티가 안 나지만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라고 했던가. 사람의 흔적이 얼마나 독하면 풀도 자라나지 않는 걸까. 자연을 나올 때는 다녀간다는 마음만 놓고 와야 하는데 우리는 버리면 안 되는 것들까지 놓고 와 버린다.


지금도 캠퍼들에게 입소문을 탄 곳은 아무리 오지라고 해도 사람이 다녀간 흔적 때문에 홍역을 앓는다. 나무뿌리에 팩을 박아 상처를 입고, 무분별한 채집으로 목피가 벗겨져 있기도 하다. 바닷가에는 낚싯줄과 바늘이 올무처럼 나뒹굴고 냇가에는 페트병이 떠다닌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거북이 코에 꽂힌 빨대처럼 인간에게 편리를 주는 것들이 자연 속에서는 해로운 물질이 되어 동식물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린 그저 이런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채 즐거운 캠핑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게 다 쓰레기. 일회용품을 사용하느냐 마느냐는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 © 둔족추장


하루치 즐거움을 위해 생산되는 어마한 양의 쓰레기
캠핑장에서도 이젠  '친환경'이 아니라 '필환경'
'불편한 진실'이 '즐거운 불편'이 될 수 있도록 나부터   


이런 식의 감정은 사실 낯선 게 아니다. 주말 캠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생활하면서도 자주 부딪히는 딜레마이니까. 뭐 하나를 사더래도 포장이 반이다. 시도 때도 없이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들, 다용도실에 켜켜이 쌓이는 택배 종이상자를 보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분명한 건 우리는 끊임없이 물질을 소비하고 끊임없이 쓰레기를 생산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종이는 썩는 데까지 2~5개월, 우유팩은 5년, 일회용 컵과 나무젓가락은 20년 이상, 플라스틱은 500년이 걸다. 생각해보면 캠핑에서만 그칠 일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있어서도 '친환경'이 아닌 '필환경'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적어도 우리의 흔적만은 자연에 남기지 말자 라는 캠핑 생활 규약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일단 일회용 식기 사용을 중단하고, 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재료의 식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설거지 역시 천연 세재와 뜨거운 물을 이용해 애벌 설거지를 한 후 집으로 가져와 다시 씻는다. 음식물도 남기는 일이 없도록 먹을 만큼만 준비하고, 현지에서의 음식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미리 장을 봐서 밑준비를 해가기로 했다. 음식물 속의 염분은 풀과 나무, 민물고기와 수초를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 최대한 간을 싱겁게 하고 남은 음식 국물은 왠만하면 근처 화장실의 변기에 버리는 것이 좋다.


흔히 '불용품'이라고 불리는 안 쓰는 캠핑 용품이나 남은 식재료를 다른 캠퍼들과 교환하는 것도 과도한 소비와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다. 텐트를 설치할 때는 주변의 어린나무들을 조심한다. 소리와 시각, 냄새도 공해다. 늦은 밤까지 주책맞게 술 먹고 고성방가 하지 말고 웬만하면 주변 이웃 텐트와 자연 속의 동물들을 위해 일찍 잠들자. 너무 밝은 랜턴 불빛과 자동차 라이트는 피하고 은은한 색상의 의상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센스가 필요하다. 과도한 연기나 냄새로 옆 텐트나 동식물에 피해를 주는 행동도 삼가야 한다.



깨끗하게 빌려 쓰고 물려줘야 하는데 © 둔족추장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그린 캠핑 문화
책임과 배려 없는 민폐 진상은 지구 밖에서 권장
녹색지구는 최고의 유산, 흔적 아닌 마음 남기기


확실히 불편하다. 애들을 데리고 과연 이 모든 규약을 잘 지킬 수 있을까? 하지만 즐거운 불편이다.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지만 최소한 우리가 자연과 이웃에 해를 끼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선인 셈이니까. 요즘엔 심지어 전기, 화로, 알코올이 없는 '3무 캠핑'까지 등장하는 판인데 그에 비하면야.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캠퍼들이 생각보다 많았나 보다. '그린 캠핑(Green Camping)' 캠페인이 점차 국내 캠핑문화에서도 확산되고 있어, 캠핑 후 떠나는 날 아침이면 캠핑장 주변의 자연에서 쓰레기를 줍는 캠퍼들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 미국 캠핑 문화에서 시작된 'LNT(Leave No Trace)' 친환경 백패킹 지침과 비슷한 맥락의 캠페인이다.


LNT :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는 7가지 수칙

1. 미리 충분히 준비하고 계획할 것
2. 지정된 지역(등산로)만 걷고 캠핑할 것
3. 배설물이나 쓰레기는 되가져 올 것
4. 자연물을 보호할 것
5. 캠프파이어는 최소화하고 화로를 사용할 것
6. 야생 동식물을 보호하고 존중할 것
7. 다른 사람을 배려할 것


사전에 잘 준비해서 불필요한 구조인력과 쓰레기 발생을 최소화하고, 지정된 구역 안에서만 활동함으로써 추가적인 자연 훼손과 재난을 막는다. 사용하고 난 화로는 불이 완전히 꺼졌는지 확인하고, 재와 돌은 표시가 나지 않도록 흩트러뜨려 자연으로 돌려보낸다. 자연물에 낙서를 하거나 표식을 하는 것을 삼가며 새로운 길을 만들지 않는다. 배설물 처리를 위생적으로 처리하고 애완동물을 통제한다. 야생 동식물과 자연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본능을 해치는 행위는 지양한다.


이 모든 수칙의 정수는 바로 '책임'과 '배려'의 마음이다. 최소 이런 마음이 없는 민폐 진상은 지구 밖에서 부려주길 권장한다. 러시아의 사냥꾼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조금은 느리더라도,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사냥을 지속적으로 즐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책임과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쓰레기 줍는 아이들 © 둔족추장


아이들은 그린 캠핑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LNT 수칙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자연 안에서 어떤 해로움을 주는지 몸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그런 아이들 앞에서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켜낸 녹색지구가 자연과 이웃, 그리고 미래 세대의 우리 아이들을 위한 최선의 유산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바램이 있다면 그린캠핑 태도와 가치가 평소의 생활 영역까지 연장되어 우리 부부와 아이들의 삶을 좀더 초록초록하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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