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18
엄마는 경제력이 없는 아빠를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세 자식을 누구보다도 번듯하게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집도 아닌 집을 식당으로 개조했다. 돈 안 되는 농사보다는 돈이 되리라. 그러면 자식들에게 쌀밥을 맘껏 먹일 수 있고, 공부도 원하는 데까지 시킬 수 있으리라. 더 이상 돈을 꾸러 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고 돈 때문에 포기할 일도 없으리라. 그때가 1997년 여름이었다.
우리 가족이 넓은 밭이 딸린 농가주택으로 이사 온 지 3~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우리의 사정을 알던 집주인은 모든 집수리를 우리가 하는 조건(+농사짓던 밭을 임대하고 관리하는 것과 월세 상승)으로 집에 붙어있는 창고를 개조하는데 허락을 해 주었다. 다 쓰러져 가는 흙으로 지어진 낡고 오래된 농가주택은 그렇게 식당이 되었다. 집크기보다 더 큰 창고를 엄마와 아빠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식당으로 개조했다. 벽을 허물고, 시멘트를 붙고, 슬레이트 지붕을 올리고, 벽지를 붙였다. 농기구를 보관하던 창고를 부엌과 연결하여 큰 공간을 만들었고, 안쪽방은 좌식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장판을 깔고 문을 설치했다. 집에 딸린 가게인지 가게에 딸린 집인지 모를 양면구조의 집이자 가게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오래된 흙벽 하나가 집과 가게로 구분되는 곳에서 우리는 자랐다.
동네의 논과 밭이 불법 창고와 고물상으로 변해갔다. 창고를 빙자해 점점 큰 트럭들이 동네에 들어왔고, 조용하던 동네는 어느새 외지인으로 북적였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손님은 많았다. 함바식당. 엄마는 매일 2~300인분의 점심식사를 만들어 냈다. 붕어찜집을 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찜보다 정식 손님이 늘어나면서 식당 분위기도 바뀌었다.
식당을 연 이후, 우리는 늘 음식 하는 소리에 잠이 깨서는 음식과 함께 잠을 자는 느낌이 들었다. 많은 식사를 감당하기 위해 매일 아침 새벽시장에 가는 엄마의 모습이 어는 순간 우리 엄마이기보다 식당 사장 같기도 했다. 가끔은 쌀이 없어 도넛을 직접 튀겨 주던 엄마가 그립기도 했다. 당연히 우리만을 위한 음식은 더 이상 먹기 어려웠다. 우리는 늘 식당에서 남은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다. 먹고 싶은 것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스스로를 챙겨야 했다. 바쁜 엄마에게 차마 우리까지 봐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방학이 되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흙벽을 넘어 우리 방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몸소 느껴야 했다.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의 말소리.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웅성웅성 웅얼웅얼 흙벽에서 느껴지는 진동이 무서웠다. 그 시절에는 그 소리가 무엇보다 싫었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들은 없는 사람처럼 숨죽여 있었다. 절대 부엌문을 넘어 식당으로 나가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우리 집이라는 공간과 식당이라는 공간이 혼잡되어 있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소리가 없어지면 그제야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나와 레이더를 세우고는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고는 한참이 지난 점심을 챙겨 방으로 돌아갔다.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집이 공공의 공간이 되어서는 사람들이 드나든다는 사실이 그 시절에는 더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은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식사 시간이 지나면 동네사람들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엄마가 있든 없든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나 차를 찾아서 마셨다. 사방이 뚫려서 누군가가 나를 다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흙벽을 뚫고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곳은 식당인지, 집인지, 사랑방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집이었던 공간이 이제는 식당으로 바뀌어 편히 있을 수 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망친 시험지를 몰래 숨기던 마당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의 허락 없이도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렸다. 우리를 위해, 우리가 먹고 공부하고 크기 위해 식당을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에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렸다. 집에서 엄마보다 먼저 냉동된 한 무더기의 물고기들을 먼저 보는 상황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이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더 집을 빨리 나오고 싶었다. 그 집이 부끄러웠다. 동네사람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는 그 집을.
그렇게 그 집에서 엄마아빠는 28년을 보냈다. 집주인과의 소송 끝에 쫓겨 나와야 했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당을 개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곳에 살기 위해 아빠는 집주인의 마당쇠노릇을 해줬다. 집주인의 농지를 관리하고 부동산을 대신해 계약을 진행해 주고, 집과 관련 없는 일도 발 벗고 나서서 정리를 했다. 그 집에 살면서 아빠의 역할은 그것뿐이었는데, 끝은 배신 아닌 배신이었다(집주인이 팔 수 없는 집을 강제로 팔려했다). 결국, 우리는 그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기에 그런 끝을 보기는 싫었는데... 결국, 우리 집이 아니었다. 우리는 결국 세입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우리 집, 아니 내 집에 집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