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17
다행히 십 년 전의 후암동의 월세는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남산타워에 가까워질수록 집은 오래되고 가격은 내려갔다. 하지만 오래된 집들이 많다 보니 실평수가 생각보 넓었다. 계획 없이 지어진 동네이다 보니 메인길을 제외한 동네길은 다 어디로 이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로 같았다. 그래서 더 재밌었다. 그 길을 따라 오르막 내리막을 다니다 보면 대저택도 나왔고 적산가옥도 나왔다. 주택가라 조용하면서도 저녁이 되면 소월길을 달리는 폭주족의 엔진소리가 동네 전체로 들려왔다.
지방에서의 프로젝트가 끝난 후 나는 다시 후암동으로 돌아왔다. 나와 동생이 살 집을 구하기 위해서. 11월 늦가을의 후암동은 또 다른 정취가 있었다. 단풍이 내려앉은 남산은 정적이면서도 다채로웠고, 남산에서는 서늘한 바람이 내려왔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천운이다. 십 년 동안 후암동에 살고 있던 동료는 오래된 부동산을 소개해 주었다. 오래된 동네답게 신기한 구조의 집이 많았다. 일본식 서랍장이 있는 집부터 3개의 방을 연결해 하나의 집으로 만든 반지하집까지. 동료의 집 같은 집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부동산에서도 어떻게든 내게 맞는 집을 찾아주려고 애썼. 그렇게 서울에서 제대로 된 월세집(전입신고가 가능한)을 만났다.
1500/50에 1.5층 투룸. 사람마다 자신의 영혼과 맞는 집이 있다고 한다. 그 집을 봤을 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늑하고 따뜻한 집. 예산보다 월세가 높은 집이었지만 왠지 이 집이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 집은 비어있었다. 특이하게 베란다를 가려면 현관을 나서 밖의 문으로 가야 했지만, 그보다 베란다가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이제 베란다에서 빨래를 돌릴 수 있다. 한 층에 두 개의 집이 있었고 4층에 집주인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래됐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건물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집이 보였다. 제일 안쪽에 넓은 안방이 있었고, 작은방은 현관을 지나 바로 나오는 주방 옆에 있었다. 방은 작았지만 그전에 살았던 고시텔에 두 배는 넘어 보였다. 작은방의 창문은 외부베란다와 연결되어 있어서, 창문으로 바로 외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안심감을 주었다. 주방 공간은 넓진 않았지만 식탁과 냉장고를 넣기에는 충분했다. 화장실도 정사각형으로 분홍색 타일이 깔려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직사각형의 집이었다. 동생과 같이 살아야 했기에 방이 바로 붙어있지 않는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집에서 풍겨오는 온기가 좋았다. 가구며 가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모를 따뜻함이 있었다.
그렇게 그 집에서 5년을 넘게 살았다. 그동안 집주인이었던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새로운 집주인으로 바뀌었다. 연로하셨던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4층까지 올라가시는 게 힘드셨는지, 내가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왠지 모르게 나는 집주인 할머니가 바로 옆에 사신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병세가 심해지셔 병원으로 가시기 전까지 할머니는 수도세를 받으러 두 달에 한 번씩 문을 두드리셨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아님에도 할머니가 계심에 안도했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할머니가 노크가 아닌 쪽지가 문 앞에 붙어있었다. 옆집에 인기척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집주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사를 준비할 때였다. 할머니와 연락이 되지 않아 부동산에 가 보니, 생각보다 오래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아들이 들어와 관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뭔가 모르게 허무함이 몰려왔다. 비록 집주인과 임차인의 관계였지만, 한 지붕 아래 함께 살던 분이었는데. 친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시골출신이라서 그렇다며 놀렸지만, 당연했던 것이 아무 기척 없이 사라졌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것이 서울 생활이라는 것일까...
어느새 나도 사라지는 것들에 익숙해져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