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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머무르는 곳...

내가 살았던 집_15

by plan B Feb 18. 2025

2011년 12월 31일, 나는 일본에서의 자취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에서 마지막이 될 친구의 기숙사로 이사했다. 다음 해 졸업과 동시에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기에 짐이 단출했다. 교통비가 비싼 일본에서 내 돈을 내고 택시를 탄 건 그때가 두 번째였다. 이삿짐센터를 부르는 것보다 택시비가 싸게 먹힐 거라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정도로 짐은 없었다. 몇 년간의 일본생활에 한국으로 가져갈 만한 멀쩡한 물건은 거의 없었다. 이민가방과 캐리어 하나, 손가방이 전부였다. 6년의 시간이 여기 압축되어 있었다. 정리된 짐을 보며 후련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내 몸에서 뭔가가 빠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A가 교환학생으로 도쿄에 오게 되었을 때도 뭔가 복잡한 신경이었다. 내게 둘도 없는 절친이 온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큰 지진이 있은 뒤 많은 고심 끝에 졸업 후 한국으로 이미 돌아가기로 결정했었기에 이상하게도 막연하게 기쁘지만은 않았다. 친구는 지진으로 학사일정이 늦어져 예상보다 한 달 늦게 일본에 들어왔다. 


친구의 기숙사는 공동기숙사와 달리 교환학생들을 위한 곳으로, 오픈원룸형태였지만 좋은 동네에 좋은 집이었다. 거기에 세탁실을 제외하고는 개별로 이용할 수 있었고 일반 맨션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타가야구의 비싼 주택지 안에 지어진 그 건물은 기숙사처럼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 큰 철문을 지나면 작은 정원이 있었고 정원을 지나면 가운데 계단을 기준으로 복도식 2층 콘크리트 건물이 양쪽으로 길게 뻗어있었다. 딱 봐도 비싸고 깨끗하고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건물. 처음 친구를 보러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일본에서 내가 살았던 어느 집보다도 넓고 깨끗하고 좋았다. 친구의 방은 계단을 올라가 2층 왼편의 가장 끝방이었다. 구조는 일반 오픈형 원룸과도 같았지만 큰 책상이 들어갈 만큼 넓었다. 안쪽 창문에서는 공원의 큰 나무들이 보였다. 주변은 조용했고, 복잡하 않았다. 


그곳에서 마지막 일본 생활을 보내기로 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나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일본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 각자의 사정으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헤어짐을 겪어야 했다. 아직 헤어짐에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내 맘을 알았던 것인지 친구는 내게 먼저 같은 날 한국에 돌아가는 것을 권유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했다. 그리고 친구에게 부탁했다. 돌아가기 전 2달만 같이 보내자고. 이후 나는 바로 방을 빼고 친구의 기숙사로 몰래 들어갔다. 아르바이트와 남은 기말고사, 졸업논문에 집에 있는 시간은 적었지만, 그 두 달의 시간은 내게 특별했다. 쉬는 날이면 우리는 새벽버스를 타고 여행을 갔고, 저녁이면 공원을 산책하며, 함 퍼즐을 맞췄다. 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집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서 친구가 나오길 기다렸다. 방에서도 절대 홀로 나가지 않았다. 들킬까 두려우면서도 우리는 그 생활을 즐거웠다. 낯선 곳에서 절친과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나는 감사했다. 내 일본생활의 마지막을 다른 누구도 아닌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어서...


그 친구가 죽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 만 4년이 지났을 때였다. 친구는 고향에서 나는 서울에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절친이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그런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 혈액암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오랜만에 본 친구의 얼굴에 나는 무너졌다. 울지 않아야지 다짐했지만 병세가 만연해진 친구를 본 순간 그 다짐은 무너졌다. 생각보다 좋지 않은 상태임에도 친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수술 후 회복하면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공유했다. 그렇게 친구의 병원생활이 한 달을 지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그날 아침은 오랜만에 엄마와 여동생이 서울로 올라오는 날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집청소를 끝내고 두 사람의 마중을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에 망설였지만 이상하게 받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았다. 친구가 죽었다고 했다. 친구가 있던 병원 바로 옆 장례식장으로 갔다. 친구는 병원복대신 수의에 빨간 꽃신을 신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친구가 떠났다. 차마 왜 장례식을 치르지 않느냐고 말하지 못했다. 왜 영정사진도 없이 친구를 보내야 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친구의 유골을 왜 그렇게 서둘러 뿌려야 했는지 묻 못했다. 나보다 더 슬픔에 빠진 친구의 가족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절친의 영혼이 왠지 그 기숙사에 남아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왠지 다시 그곳을 가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내가 그곳을 떠날 때 너는 같이 있었는데... 혼자 다시 돌아가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역에서 30분을 걸어가야 했지만 머리보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친구와 종종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을 지나 오솔길로 이어진 길을 지나자 기숙사 간판이 보였다. 큰 철문으로 입구가 막혀있었지만 2층 왼쪽 제일 끝 편에 있는 친구의 방은 다행히 잘 보였다. 전화를 하면 달려 나와 큰 철문을 열어주던 친구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둘이었는데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십 년을 넘는 시간 동안 친구로 지냈는데, 이상하게도 일본에서 같이 살았던 그때의 그 모습이 제일 선명하게 남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그리웠다. 같이 즐겨 마시던 술을 부어주며 그래도 친구가 그곳에 매여있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친구가 소원대로 세계를 누비다가 원하는 그때, 원하는 그곳에 내려앉기를 빌었다. 나를 위한 위안이란 걸 알면서도 그곳을 다녀온 뒤 마음이 이전보다는 괜찮아졌다. 이제는 조금 더 편하게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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