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13
그때는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같이 산 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상상치도 못했었다. 20년간 항상 누군가와 살아왔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첫 자취이자 첫 해외생활에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돈이 절약되기도 했지만 같은 한국인으로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선택했었던 것 같다.
신주쿠 7초메의 낡고 오래된 아파트. 유학원의 추천에 들어간 그곳은 다다미가 깔려 있는 딱 보기에도 오래된 아파트였다. 정확히 전체가 몇 층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학원에서 운영하는 방은 총 3개였다. 복도식 아파트에 층당 3-4호실이 있었고, 우리가 살던 방은 3층 제일 안쪽이었다. 옆방에는 유학원은 같았지만 다른 어학원에 다니는 한국인 3명이 살았었고, 나는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모녀와 같은 방에 살게 되었다. 방하나에 거실 겸 주방이 따로 있었고, 방에는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은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옆집 벽이라서 베란다 문을 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며칠 먼저 일본에 들어온 모녀가 짐을 이미 꾸려놨었기에 나는 빈 공간에 짐을 풀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언니와, 그 언니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함께 일본에 온 어머니. 처음에는 불편하다는 생각보다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다 버리고 딸을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까지 온 어머니. 고등학교 이후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나는, 언니가 부러웠고 어머니의 그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밥솥도 사용하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김치며 반찬을 만들어 주셨고, 언니는 아직 일본어가 어려운 나를 위해 친구를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나의 첫 일본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어학비자였던 언니는 가족비자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어머니는 3개월 관광비자 만료가 도래하기 전에 다시 한국으로 출국을 해야 했다. 어렸던 나는 어머니가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가져다주시는 선물에 마냥 기뻤다. 그러나 언니는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3개월마다 한국을 오가며 몰래 일하는 것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언니와 어머니의 싸움은 잦아졌다. 언니가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더 날카로워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그 사이에서 듣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속사정까지 들을 수밖에 없었다. 딸을 위해 한국의 집과 모든 것을 정리한 어머니는 한국에 다시 돌아가기 어려웠고, 언니는 그런 엄마가 옆에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던 거 같다. 거기에 비자가 없다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비자를 위해 돈을 주고 결혼을 해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날 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그저 둘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혹시나 같이 밥을 먹으러 가더라도 경찰을 보며 나도 모르게 새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번씩 대대적인 비자 단속에 본국으로 추방됐다는 뉴스를 볼 때며 눈치가 보였다. 결국 어머니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언니의 뒷바라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심 안심했다. 이제 같이 밥을 먹더라도 티브이를 보더라도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기에... 결정 이후 언니와 어머니의 사이는 다시 급속으로 좋아졌다. 아니 한층 더 애틋해졌다.
언니와 어머니가 셰어하우스를 나가는 시점에 맞춰 나도 집을 다시 찾기로 했다. 다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고, 신주쿠에 위치한 셰어하우스의 비용이면 30분 떨어진 곳에 나름 괜찮은 원룸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다. 내가 먼저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일본에 온 지 반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계절이 세 번 바뀌어서인지 짐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집을 떠나며 조금은 넓어진 집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와 어머니의 짐도 빠질 것이다. 그럼 훨씬 더 넓어지겠지. 그리고 다시 그곳으로 새로운 가족들이 들어오겠지.
나는 언니와 어머니 사이에 절대 낄 수 없었다. 같이 살긴 했지만 진짜 가족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반년이 더 힘들었다. 내가 도움을 줄 수도 해결방안을 같이 생각할 수도 없어서. 내가 그들의 가족이 될 수 없어서 힘들었다.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없어서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언니와 어머니를 보며 한국에 있는 엄마가 생각나서 더 힘들었던 거 같다. 그들의 끈끈한 가족애와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할 때마다 나는 왠지 내가 한국에 엄마를... 가족을 버리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새로운 도전 앞에 많은 것을 선택하고 그리고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헤어짐도 있다. 부모에게서 헤어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나는 언니와 어머니를 보며 실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선택의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일 수도 있는 반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에 그것을 내게 일깨워준 언니와 어머니에게 언젠가는 전하고 싶다.
감사했었다고. 그리고 나의 가족에게도...
그동안 함께 해 줘서 고마웠다고.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사랑한다고 언젠가는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