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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그 당시에 내 영혼이 아직 묻어있다면...

내가 살았던 집_14

by plan B

가끔 내가 살았던 집을 다시 가 보고 싶은 경우가 있었다. 오래전이라 주소 없이는 찾아가기 힘든 곳이었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인연이 닿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 집은 내가 일본에서 꼬박 4년을 살았던 곳이었다. 내 기준에서 오래 살았지만, 특별한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집이 생각나는 건, 한국도 아닌 일본에서 부동산을 통해 처음 구하고 처음으로 홀로 살게 된 집이었기 때문인 거 같다. 그래서인지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 이상 넘었는데도 가끔 그 집이 떠올랐다. 특히 내가 일본에 있었는지 의심하게 되는 순간에 더 그 집이 생각났다. 그 집을 다시 보러 가게 되면 생각나겠지. 그때의 내가 생각나겠지...


신주쿠에서 세이부신주쿠선을 타고 30분.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작은 역에서 걸어서 6분. 어학원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신주쿠를 환승 없이 갈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주변에는 큰 건물도 없고 큰 도로와도 떨어져 있는 주택가. 그 안에 있는 5층 콘크리트 맨션. 입구의 쓰레기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면 층마다 5개의 방이 마주 본 형태로 지어져 있었고, 작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현관을 나와 뒤로 돌아가면 자전거와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 겸 공터도 있었다. 우리 집은 5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집이었다. 다행히 마주하는 집도 없었고, 더 다행히 바로 옆집에는 어학원 언니가 살았다. 열쇠로 문을 열면 6평 정도의 작은 마룻바닥의 원룸이 한눈에 들어왔다. 신축은 아니었지만 오래되지 않은 집이라 다다미가 아닌 마룻바닥이었다. 신발장 옆에는 세탁기를 놓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고, 그 뒤로 작은 주방과 욕실 겸 화장실이 있었다. 주방을 지나면 방이 있었고 한쪽으로 작은 매입형 수납장이 있었다. 방안 쪽에는 유리로 된 큰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면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일본이라 베란다에 별도의 창문은 없었고(잦은 자연재해 때문에 베란다에 창문이 없다), 옆집과는 얇은 가벽만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주변에 우리 집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뻥 뚫려 있는 뷰를 볼 수 있었다. 그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시키킹(보증금) 월세 2달 분에 레이킹(집주인에게 주는 감사금)은 0, 입주 캠페인으로 한 달 분의 월세가 감면되었고, 보증회사(외국인은 필요)도 할인해서 1만 엔에 구할 수 있었다. 월에 6.5만 엔에 공과금 별도. 가전은 냉난방이 되는 에어컨이 전부였지만, 이 월세로 당시에 도쿄에서 신주쿠 근처(어학원 인근)에서 살만한 곳을 구하기는 힘들었다. 일본어로 된 계약서에 첫 사인을 하고, 겨울이 깊어지기 전 나는 그 집으로 이사했다. 이사 후 침대며 가전을 하나씩 채워갔다. 뭔가 모르게 어렸을 때 가지지 못한 인형집을 채우는 듯했다. 재미있으면서도 내가 가구나 가전을 산 다는 것이 신기했다. 진짜 어른이 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재미는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오전에는 아르바이트, 오후에는 어학원, 저녁에는 입시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학에 입학을 하고 나서는 늘어난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저녁 아르바이트를 구했고, 집에 온전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침 지옥철을 타고 학교를 가고 저녁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학교나 알바가 없는 날이면 기절하듯 잠만 잤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목적 없이 지쳐만 갔다.


처음 그 집을 찾았을 때 생각했다. "세이부신주쿠선 전철역을 하나씩 다 가봐야지." "이 전철의 끝은 어딜까?"하고 상상으로 가득했었는데, 생각보다 유학생활은 힘들었고 외로웠다. 한국을 떠나 4년이 지날 때쯤, 학교와 알바의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나는 향수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메신저도 활발하지 않았기에 한국에 연락을 하려면 큰 맘을 먹었어야 했다. 전화조차 편히 하지 못하는 곳에 내가 와 있구나. 처음으로 내 속의 외로움과 마주했다. 그러며 집착적으로 한국 소식을 찾아보고 한국 프로그램을 찾아봤다. 특히, 무한도전이나 1박 2일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한국이 그리웠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린 거 같았다. 이렇게 계속 달리면 되는 걸까. 그럼 그 앞에 기다리는 건 내가 원하던 것일까. 불안이 엄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 앞 상점가에서 반찬거리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오늘은 후지산이 훨씬 더 선명하게 보이네요." "여기서 후지산이 보여요?" 실로 오랜만에 하늘을 봤다. 멀리서 아스라이 보이지만 선명하게 눈 덮인 후지산의 정상이 보였다. 그 동네로 이사 온 지 3년이 넘어갈 때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란다로 나갔다. 거리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크고 가까이 후지산이 보였다. 이 풍경을 3년 동안이나 모르고 살았던 건가... 그 정도로 내게 여유라는 것이 전혀 없었던 건가...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훨씬 많았지만 분명 낮에 집에 있었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3년 동안이나 나는 그 풍경을 놓쳤다. 앞만 보고 달려서 여유라곤 없던 내 마음이 후지산을 놓친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안의 뭔가 모르게 무언가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이후 가끔씩 베란다에 나갔다. 날에 따라 선명하게도 흐릿하게도 보였지만 후지산은 그대로 그곳에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지 8년 만에 본 그 집은 어딘가 모르게 생소했다. 역에서 지도를 보지 않고도 찾아갈 수 있다는 것도 왠지 신기했지만,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맨션을 보면서 내가 여기 살았었다는 게 뭔가 믿기 어려웠다. 집으로 가는 길은 처음 그 집을 만나러 가던 길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상점가는 여전히 조용했고, 매일같이 들르던 편의점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와중에 나만 달라져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부러 당시에는 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근처 미술관을 들렀다. 어린아이의 웃는 모습이 가득 있는 미술관이었다. 불과 내가 살았던 곳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에 나는 이곳의 존재조차 몰랐던 거 같다. 천천히 아이들의 미소가 담긴 전시관을 돌아보며 복잡한 감정이 스쳐갔다. 이런 곳을 나는 이제야 즐길 수 있는 건가. 가까이 있을 때 자주 올걸이라는 아쉬움과 함께 그 당시와 달라진 나를 느꼈다. 아등바등 달리던 시절의 나는 이제 그곳에는 없었다. 훨씬 안정적인 생활을 얻었고 여유를 얻었지만 요즘은 왠지 모르게 그 시절이 그립다. 보이지도 않는 터널을 힘껏 뛰어나갈 수 있었던 그때가...


만약 그 집에 그 시절의 내 영혼이 아직 묻어있다면, 베란다에 나가서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마음껏 눈에 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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