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곳_8
사실 고시원 같은 구조에 처음 살아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 그대로 고시텔에 사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급하게 얻은 6개월 단기 프로젝트. 나는 다시 서울로 급하게 올라와야 했고, 프로젝트가 이후의 거취는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회사에서 10분 거리의 여성전용 고시텔이었다. 방을 먼저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당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만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모여대 정문에서 5분 거리였고, 주변은 먹자골목 상권이었다. 가장 중요한 회사를 도보로 갈 수 있는 곳. 그것만으로 나는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방은 말을 잃게 만들었다.
낡은 건물 3층에 있는 고시텔 문을 연 순간 몇 개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문을 보았다. 한 층에 30개가 넘는 방이 있었고 양쪽으로 한 사람 지날 수 있을까 말까 한 복도가 있었다. 실제로 지나가다가 어느 방에서 문이라도 연다면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게다가 안내된 곳은 창문조차 없었다.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기려면 월 5만 원을 더 내야 한다기에 과감히 포기했었는데(최저시급도 받지 못했던 시절이라 월 5만 원의 차는 내게 컸다), 설마 크기마저 이렇게 작은 방일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방문을 열자 보인건 1평도 안 되는 작은 방이었. 신발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은 따로 있지 않았고, 고시텔 입구에 벗어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충격이었던 건 맞춤인듯한 책상과 침대였다. 미니싱글도 안 되는 사이즈에 나무로 된 받침만 있는 침대는 누우면 내 키를 알 수 있게 머리와 발이 벽에 닿았다. 거기에 발을 올리면 책상의 윗부분에 닿을 정도였. 그 책상 위에 작은 티브이가 있고 옷과 책을 넣을 수 있는 작은 선반. 그게 다였다. 화장실과 욕실은 각 층에 2개씩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주방이 있었다. 그래도 다행 항상 밥은 있었다.
그래, 6개월이야. 6개월만 참으면 된다. 어떻게든 여기서 버텨야 다음이 있을 거야. 그때는 그것만 생각했다. 잠만 잘 수 있는 공간. 그거면 된다. 다행히 대학교상권이라 주변에 밥값은 쌌고 먹을 게 넘쳤다. 그 집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방 안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들리는 노크 소리도, 발조차 완전히 뻗지 못하는 좁은 공간도 다 참을 수 있었다. 다음을 생각하면 그래야 했고,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 서울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공간이었다. 불만은 없었다.
그해 여름은 너무나도 더웠다. 중앙냉난방으로 에어컨은 낮에 짧게 가동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른 개가 넘게 있는 방의 열기를 쫓을 수는 없었다. 열대야가 되면 선풍기를 아무리 돌려도 방은 찜통이 되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샤워로 열기를 내리려는 사람들의 줄은 길었다. 나는 최대한 밖에서 늦게까지 시간을 보낸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도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다 12시가 다 되어 고시텔로 돌아왔다. 더위를 토해내는 방문들이 곳곳이 열려있었다. 내 방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이리저리 옮기다 내 방에 가까워졌을 때 옆방에 문이 처음으로 열려 있는 것을 봤다. 그곳에는 외국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여성이 더위에 지쳐 누워 있었다. 한 명은 침대에, 한 명은 바닥에. 이 작은 공간에 두 명이나 살 수 있는 건가. 순간 그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서글펐다. 최소한의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녀들을 보며 삶이란 게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으로 돌아와 나무로 만든 침대에 앉으니 왠지 모르게 이 방이 넓어 보였다.
프로젝트가 끝남과 동시에 그곳을 나왔다. 6개월 동안 살았던 곳이었지만 이민 가방하나에 짐을 다 넣고도 공간이 남았다. 그때였던 것 같다. 삶에서 집이라는 것이 공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느꼈던 건.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인지에 대해 생각했던 것도.
그리고 내 삶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지도, 그 경험을 통해 결정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