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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할머니집으로

내가 살았던 집_7

by plan B

10명이 한방에 살았던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는 처음으로 아빠에게 애원했다. "자퇴하게 해 달라고." 울며불며 애원했지만 아빠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빨리 집을 떠나고 싶어 선택한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버티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내가 살기 위해 할머니집에서 학교를 다니겠다는 최후의 통첩을 날렸고, 아빠는 마지못해 허락했다. 고3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집에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 사이 동생들이 각자의 영역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할머니 집에는 아직 빈 방이 두 개나 있고,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그런 나를 엄마는 못마땅해했다. 굳이 집이 가까이 있는데, 왜 집으로 오지 않고 할머니 집에서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된다면 엄마 자신이 할머니와 봐야 할 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기도 했던 거 같았지만, 그때에 나는 사춘기였고 무엇보다도 내 방을 가지고 싶었다. 할머니 또한 너무나도 반겨 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생활을 너무나도 기대했다.


할머니집에는 총 4개의 방이 있었다. 큰 대추나무가 있었던 마당을 지나 철제 미닫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툇마루 겸 거실 있었고 그 안쪽으로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이 있는 안방이 있었다. 옆으로 제일 작은 창고방, 오른편으로는 햇빛이 제일 잘 들어오는 안방보다 큰 방이 있었다. 왼편에는 주방과 그 뒤편으로 화장실 겸 욕실이 있고 욕실은 집 밖의 수돗가로 이어져 있었다. 외부 수돗가로 이어지는 길에는 담벼락이 있었고 그곳에는 언제부터 있는지 모르는 잡동사니들이 항상 쌓여 있었다. 주방 입구 바로 오른편에 다락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이 있었고 문을 열면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꽤 넓은 다락이 있었고 다락은 바로 지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다락에도 항상 집기들이 가득 있었지만 가족 중 누구도 그 다락을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외부 수돗가 앞으로는 각 방마다 부엌이 딸린 작은 아랫방 4개가 나란히 있었고, 본채 맞은편의 대추나무를 지나면 큰 창고와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아랫채는 항상 세를 줬기 때문에 언제나 북적였다. 우리는 같은 마당을 공유했고, 가을이 되면 대추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열매를 따 먹었다.


아빠의 형제들이 지은 집. 전문가가 지은 집이 아니었기에 뭔가 허술했지만 그만큼 수리도 쉬웠다. 할머니집 안방 옆 창고방은 욕실이었다. 할머니집에 우리 가족이 살게 되고 나와 동생이 태어나면서 방이 부족해지자 아빠는 욕실을 지금의 주방 뒤로 옮기고 그곳을 방으로 만들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당시에는 더 이상 수리 하기 힘들어져 창고방으로 사용되었지만, 그전에는 작은 아빠네 가족이 살았었다. 안방 뒤로 창고도 그쯤 해서 만들었다. 아빠는 할머니집 뒤에 저수지 땅을 팔았고 동시에 안방 뒤를 시멘트로 된 벽돌로 쌓아 큰 창고를 만들어 임대를 주었다. 그 창고는 실 만드는 기계로 가득했고, 집안으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항상 들렸다. 안방 창문을 막지는 않았지만 그때 이후로는 들녘대신 기계뷰로 바뀌었다. 할머니가 안방에서 큰방으로 방을 옮긴 때가 이때쯤이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안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데 굳이 창문은 필요치 않았다. 창문보다 나는 내방이 더 중요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학교를 가기 위해 나는 6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고 10시에 하교를 하고 나면 새벽에도 집까지 데려다주는 독서실을 다녔다. 독서실 버스는 매일 새벽 1시 반에 출발했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밤이었다. 매일이 잠과의 싸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약 1년 반을 버티며 졸업을 했다. 그때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건, 그렇게 잠을 자지 않아서 제정신인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매일 아침은 할머니가 차려주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좋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사랑해 주는 사람. 할머니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 믿음으로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할머니집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거 같다. 그러나 내가 대입에 실패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할머니집에 있게 되면서 그 관계는 바뀌었다.


하루 중 집에 있는 시간이 고등학교 때보다 훨씬 늘어나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고, 듣지 않아도 될 일들이 들렸다. 매일같이 나의 일과에 대해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할머니의 통화소리.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할머니는 엄마도 아빠도 아닌 사람에게 나의 흉을 매일같이 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나 귀찮은 존재였구나.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거기에 그 대화 속에는 항상 나뿐만 아니라 엄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나 때문에 엄마까지 욕을 먹는 거 같아서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무너뜨리기 싫어서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져있었다. 그날 이후였던 거 같다. 시간이 되면 할머니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던 게. 일주일에 한두 번이었던 게 어느 순간 할머니집보다 집으로 가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자연스럽게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렸을 때 친척들이 제사로 할머니집에 다 모였을 때가 생각난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우리 집 고모네 삼촌까지. 대가족이었다. 한참 나이 차 나는 언니와 오빠들이 막내였던 우리와 놀아줬고, 큰엄마와 엄마는 제사음식을 하고 아빠와 큰아빠는 지방을 쓰고 밤을 깎고 술을 준비했다. 그 넓은 할머니집이 사람들로 꽉 차서는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때 작은집 오빠였는지 큰집오빠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말을 했었다. 나중에 할머니 집 아랫채를 수리해서 가족들 다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내 소원은 그거라고. 그 당시에는 되게 좋은 꿈이라 생각했는데 해가 지날수록 비어 가는 할머니집을 보면서 그 소원은 참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꿈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비어버린 할머니집의 안방을 보면 복합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듣지 말았어야 할 통화가 아직도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듯한. 대가족이 옹기종기 모여서 각자 자기 일을 하던 곳. 누군가에게는 가족 전체가 모여 살기 원했던 곳. 이제는 나이 든 할머니만 남아 버린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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