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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8 고시촌의 겨울

내가 살았던 집_6

by plan B

서울에 상경하게 되었을 때 처음 집을 보러 간 곳은 신림동이었다. 서울에서 싸게 방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그곳뿐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강남은 강남이라 사람 사는 곳이 아니고, 용산은 용산이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했었던 거 같다. 그 외에 동네는 사실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몰랐다. 친인척 없는 서울에서 내가 아는 곳이라고는 티브이에서 본 곳뿐이었다. 좋은 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내가 가진 돈에서 얻을 수 있는 집이면 만족한다 생각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할 수 있는 게 어딘가. 부동산에서 보여준 집 중에 그 집을 고른 건 주머니 사정에 딱 맞았기 때문이었다. 역에서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렸지만 버스 정류장도 바로 앞에 있었고, 무엇보다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입구는 터치키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고, 방마다 도어록이 있었다. 게다가 신림동 고시촌의 꼭대기는 아니었다. (사실 이때 부동산 차로 이동해서, 경사가 이 정도로 심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100/38(전기수도가스 별도) 3평 남짓 되는 서울 집을 얻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에 화장실이 있었고, 왼편에 작은 주방과 세탁기가 있었다. 요리를 할 때면 현관에 서야 할 정도로 작은 주방이었지만, 그에 비례해서 화장실은 의외로 넓어서 마음에 들었다. 오른편의 방은 나름 미닫이문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2평 남짓의 방에 책상과 냉장고, 옷장이 나란히 있었다. 침대는 없었다. 세로로는 한 사람이 가로로는 다리를 접어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만이 허락된 방이었다. 빨래라도 해서 건조대를 펼치는 날이면, 테트리스를 해야 했다. 창문이 있긴 했지만 북향인 데다 1층이라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방범 창살이 있어 불을 켜지 않으면 약간 교도소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방에는 희망이 있었다. 그때에 나에게는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위해서 이 집은 나에게 시작점이었다.


매일 학원과 아르바이트로 가득 찬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인턴생활을 하게 되고, 일주일에 집에 들어올 수 있는 날이 이삼일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도 서울 하늘아래 내가 돌아올 곳이 있다는 그 안도감이 좋았다. 그렇게 계절은 봄에서 여름이 되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다. 나는 퇴근 없는 인턴생활에 지쳐갔고, 고시촌의 거리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아직 일 년도 되지 않는데. 내가 선택한 이 생활이 이 직업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그때 사고가 났다. 출근을 하려 건물을 나선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눈앞은 스키장이었다. 아니 아이스링크였다. 햇빛을 받지 못한 눈이 얼음으로 변해서는 한발 내딛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 날에도 출근을 해야 했다. 아침에 제출해야 할 프로젝트가 있었고, 그건 그 순간 내 손안에 있었다. 나는 몸을 낮추어 얼음 위로 발을 내디뎠다. 어마무시한 경사에 몸을 아무리 낮춰도 나는 속절없이 밀려내려가다 이내 중심을 잃고 팔꿈치부터 넘어졌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그 고통 속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내 옆으로 스노보드를 타는 듯한 자세로 한 사람이 내려갔다. 그 순간 나를 지나치는 그 사람이 원망스럽기보다, 나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도 제출이 먼저였다. 겨우 제출을 하고 간 병원에서 팔을 걷어 올렸을 때 팔꿈치는 시퍼렇게 멍들어있었다. 팔꿈치에 금이 갔다고 했다. 어깨까지 깁스를 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나를 돌봐줄 이 하나 없는 이 도시를 생각했다. 깁스를 하는 순간 혼자 머리조차 감지 못한 채 꼬질꼬질해져 방구석에 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매일 재활을 오는 조건으로 선생님은 부목으로 팔꿈치를 고정해 주었다. 금이 갔다고 변할 건 없었다. 나는 집으로 가지 못한 채 일을 해야 했다. 한쪽팔로 청소를 하고 영수증을 붙이고 편집을 했다. 매일의 재활은 하루 걸러가 되고 결국 이 주 뒤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나는 나의 아픈 팔꿈치를 부여잡고 일했다. 그래도 앞으로가 있겠지. 내가 원했던 일이라 다독이며...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의도치 않게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나는 일과 함께 팔꿈치도 잃었다.


아늑한 나의 첫 자취방이 아니라 감옥 같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꿈꾸던 것이 이게 맞을까 하는 혼란에 빠졌다. 뭔가에 휩쓸려 지나가는 듯했다. 이 집이 나를 떠나라 하는 거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뭔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자신도 꿈도 없어진 거 같았다. 그렇게 나의 첫 서울 생활을 막을 내렸다.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은 일이다. 그 이후 고향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다 서울로 (물론 신림동 고시촌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돌아왔다. 팔꿈치도 완전히 나았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끔 생각한다. 그때의 나를. 꿈이 있었던 나를. 꿈을 꿀 수 있었던 나를. 꿈을 위해서 팔꿈치 정도는 받칠 수 있었던 그때의 나를. 가끔 지도를 펴서 그 집을 찾곤 한다. 십여 년간 많이 바뀌었지만, 그 집은 그대로 있었다. 물론 월세도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서울대입구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했던 그 집이 왠지 모르게 그립다.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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