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_4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한 18번의 이사를 했다. 시골의 농가주택부터 양옥집, 기숙사, 고시원, 셰어하우스, 다가구주택, 오피스텔 등. 다시 돌아간 곳도 있었고 이제 어디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스쳐 지나간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아파트는 없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아파트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곳은 내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세뇌 또한 있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아주 강하다. 아빠는 강 건너 어마무시한 속도로 올라가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모래 위에 쌓은 성"이라고 했다. 안전하지 못하면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성(실제로 그 지역의 아파트는 모래 위에 지어졌다). 강 건너 둑에 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아빠의 말에 수긍했던 거 같다. 하얗게 올라가는 아파트 성을 바라보며 내가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땅과 가까지 살아야 한다." 아빠는 죽어도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산 중턱에 있는 외할머니의 주공 아파트를 갈 때면, 한시를 버티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자고 성화를 냈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엄마 몰래 아빠를 흘겨보았다. 결국 버티지 못하던 아빠는 차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그보다 시간이 길어지면 우리를 남기고 홀로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그때마다 두 번의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돌아 집으로 가야 했고, 그때마다 엄마아빠의 싸움소리는 커졌다. 그럼에도 나는 외할머니의 집을 갈 때마다 신이 났었다. 시골에 없는 큰 슈퍼마켓이 단지 안에 있고 놀이터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외할머니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우리에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으면 했다. 그래서 아빠 몰래 강 건너 새로 올라가는 아파트에 청약을 넣었다. 한 시간에 버스 한 대 다니지 않는 이곳보다 좀 더 학교 다니기 편한 곳. 흙벽 사이로 벌레가 나오고 쥐가 마당을 뛰어다니는 그런 곳이 아니라 벌레 걱정 없고 통학 걱정 안 해도 되는 곳. 엄마는 아파트를 위해 남매가 잠이 들면 새벽시장을 나갔다. 그곳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계절마다 나오는 채소를 묶었다. 배추를 묶고, 열무를 묶고, 고추를 담고. 그리고는 우리가 깨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 아침을 차렸다. 그러나 엄마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파트를 얻지 못했다.
아빠에게 들킨 청약은 결국 큰아버지 가족에게 넘어갔고, 우리가 들어갈 곳이었던 강 건너 아파트는 큰아버지 가족의 집이 되었다. 큰아버지 가족이 이사 간 후 딱 한번 그 집에 가족 다 같이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방 3개에 큰 베란다가 딸린 거실이 있는 고층의 아파트. 안방을 제외한 두 개의 방은 언니와 오빠가 각 하나씩 사용하고 있었다. 남매 각자의 방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도 베란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더 신기했다. 강 건너가 보였다. 저 강을 건너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낡은 시골집이 있는데. 왠지 그곳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 가족에게 아파트는 연이 없었다. 엄마는 매번 아파트에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아빠의 불화와 같은 반대에 부딪혔다. 거기에 점점 남매가 커갈수록 청약비용은 교육비로 들어갔다.
이제는 오래된 아파트가 되었지만 강 건너에서 우리 집이 되었을 수도 있는 아파트를 보며 나는 되뇌었다. "모래 위에 쌓은 성". 내가 살 곳은 아니다. 그렇게 나도 믿고 싶었던 거 같다. 이후 아파트 외에 많은 집을 거치면서도 아파트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다른 것보다 돈이 없어서였기도 했지만, 어릴 때의 세뇌와 상처는 생각보다 내 가슴속에 크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 생각이 바뀐 것은 극히 최근이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집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동산과 관련된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여기의 대장주 아파트는 어디고 부동산 취득세는 어떻고 요즘 시스템은 어떻다 등. 자연스럽게 넘어간 아파트 얘기에 나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뿐 아니라 집들이에서 본 최신 아파트는 신세계였다. 아파트가 이런 곳이었다니. 내가 알 수 없는 시스템과 장치들이 가득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의 진화에 한 번도 개입된 적이 없었다. 마치 폴더폰에 머물러 스마트폰으로는 넘어오지 못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파트 하나로 삶의 질뿐만 아니라 사람의 위치를 이렇게 까지 바꾸는구나.
나는 아직 모래성에 있었다.
집에 대해서까지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겠지. 그럼 나는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가. 처음으로 아파트라는 공간이 건물이 그 시스템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