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이면 보통 전선인가. 이데올로기의 전선 아닌가. 어떻게 온전하게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겠는가,라는 체념 끝에는 분노가 솟구쳤다. 이데올로기 제까짓 게 뭔데 양심도 없지, 오빠 같은 죽음이 양심이 짐이 안 되는 이데올로기 따위가 왜 있어야 하느냐 말이다.
내 나이 스물둘이었다. 파마도 하고 엷게나마 입술칠까지 하게 된 것이 어찌 타의에 의해서만이겠는가. 그렇건만도 조금씩 모양을 내고 싶어 하는 자신에 대해 괜히 남의 탓을 하려고 했다. 화가들 때문에, 초상화부를 위해서 내 몸 아낄 줄 모르고 대단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다. 모양을 낸다는 건 곧 양키들을 겨냥한 적극적인 자기 상품화에 다름 아니라는 피엑스의 특수성 때문에도 그러했지만, 초상화부 매상의 꾸준한 신장세 때문에도 나는 마음대로 세도를 부렸다. 뒷짐을 지고 화가들 사이를 누비며 그림 솜씨가 마음에 안들면 손끝으로 톡톡 책상을 두드리면서, 아무개 씨, 그것도 그림이라고 그렸어요. 발가락으로 그려도 그보다는 낫겠어요, 양키 돈이라고 거저 먹으려 드는 게 아녜요, 이런 그림 떠맡기려면 내 입이 얼마나 해진다는 거나 알구 이래요? 하며 나는 마치 방과 후에 열등생만 남겨 놓고 억지로 과외 지도 시키는 여선생처럼 교만하고 짜증스럽게 한숨도 쉬고 신경질도 부렸다.
목련 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며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