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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래너앤라이터 Oct 29. 2024

# 5. 장작불 같은 사랑

두울, 서울 아가씨를 만나다.


# 5. 장작불 같은 사랑


늦은 밤 그녀에게 걸려온 뜻밖의 전화로 이뤄진 만남은 유쾌하지 못했다. 그녀와 낯선 남자는 술에 취해 이성적 판단이 약간 흐려진 듯했다. 자리에 앉자 그녀는 나에게 낯선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동생이라는데 매우 친밀한 관계로 느껴졌다. 그는 ROTC로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고 주말에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해 1도 궁금하지 않았다. 왜 나를 이곳으로 불렀는지에 대해 궁금할 뿐이다. 술에 취한 탓인지 그녀는 본론을 빨리 꺼내지 않았다.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몇 번 오고 간 후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잠시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낯선 남자만 남긴 채 그녀와 나는 잠시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전화해서 당황스럽게 해 드려 죄송해요. 저 친구가 저한테 오늘 사랑 고백을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싫다고 거절했는데 끝까지 매달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도저히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여서 오빠께 전화드렸어요. 저 친구에게 얼마 전 오빠를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고 얘기했거든요. 저 친구가 단념할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그녀와 나는 자리로 돌아왔고 그녀는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연기와는 거리가 먼 나는 어색한 표정과 말투를 들키기 싫어 말을 최대한 아꼈다. 그녀가 리드하는 대로 고개만 끄덕이거나 미소로 응수했다. 그녀의 가짜 애인이지만 기분이 좋았다. 처음 포차에 들어왔을 때 낯선 남자로 인해 굳어버린 내 몸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며 스르르 풀렸고 반대로 낯선 남자의 몸이 점점 굳어져 갔다.


꽃다발과 반지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박스가 고백의 실패를 나타내 듯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그녀와 나와의 관계를 들은 그는 매우 실망한 표정으로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말리지 않으면 그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할 상황이었다. 여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늦은 시간을 핑계로 계산을 하고 마무리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조용히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는 생각보다 술이 많이 취해서 걸음을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졸지에 처음 본 남자를 부축하게 되었고 택시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


그녀도 많이 취한 듯 보였고 시간이 늦어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려고 했다. 그녀도 데려다주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우리 둘은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취기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흔들리는 택시의 움직임에 힘들어 보였다. 어느 순간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내 볼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코너를 돌면서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되었다. 어깨에 기댄 머리는 점점 내려오더니 내 허벅지로 떨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은채 가만히 그대로 있었다. 그녀와 몸이 닿자 내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택시 안의 온도도 금방 뜨거워졌다.


샴푸 향기가 섞인 그녀의 머릿결이 내 다리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되었다. 나의 손놀림에 그녀는 눈을 찌푸리며 뜨려고 했다. 그녀 머리에 있던 손을 잽싸게 치웠다. 그녀 눈과 내 눈 사이의 거리는 2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눈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녀는 두 손으로 내 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로 내 입술을 끌고 왔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놀란 나는 목을 뺄 뻔했다. 그녀가 술에 취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피해야 한다는 게 나의 도덕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에게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에 나는 온몸이 떨렸다. 입맞춤은 멈추지 않았고 둘의 체온은 점점 올라 내 쉬는 숨이 점점 뜨거워졌다.


그녀 집 앞에 내린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한참 동안 눈 맞춤으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전했다. 말로 고백하지 않았을 뿐 둘 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용기를 냈다. "내일 제가 전화했을 때 받으면 그때부터 사귀는 겁니다."라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다음날 점심때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녀는 식사 도중 전화를 받았다. "어! 제 전화받았으니 지금부터 저랑 사귀는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웃음으로 말을 덮는 듯했다. 웃는 가운데 매우 작은 목소리로 "네"라는 그녀의 대답이 들렸다.


속으로 외쳤다. "만세! 만세! 만세!" 나는 점심 식사 전이었는데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어두웠던 나의 청춘에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주말에 첫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설렘을 한가득 담고 있으니 긴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회사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그녀와 데이트를 구상하는데 온 정신을 쏟았다.


첫 데이트에서 그녀와 결혼을 할 것 같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강렬하게 시뮬레이션되었다. 이후 그녀는 더 친밀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편안했고 무엇을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평생 행복할 것 같았다.


우리는 몇 번의 데이트로 급속하게 사랑이 농밀해졌고 잠시도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계속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주말이면 새벽같이 만나서 저녁 늦게까지 함께 했다. 우리의 사랑이 깊어졌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나를 집으로 초대하셨다. 그녀와의 첫 데이트에서 느낀 강렬했던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양손 가득 선물을 사들고 그녀 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그녀의 부모님께 넙죽 절을 했다. 마치 결혼을 하겠다고 허락을 받으러 온 사람처럼 진지함이 배어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어른들의 질문 공세가 시작되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것을 실감한 날이었다. 여러 질문들이 이어지다 특정 질문 이후 질문이 뜸해졌다.


"자네 고향이 어딘가?" "대구입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안동이 고향이셨다. 내가 경상도 사람이란 소리에 일단 합격인 듯 보였다. 무엇이든 맛있게 잘 먹는 나는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그녀의 어머니는 밥을 더 하겠냐고 물어보셨는데 잠시의 고민도 없이 더 달라고 말씀드렸다. 경상도 남자에다가 밥까지 잘 먹는 청년이 제법 마음에 드신 표정이었다.


두 분은 흐뭇한 표정으로 내가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중간중간 나와 딸을 번갈아 보시기도 했다. 나의 강렬한 느낌대로 척척 진행되었다. 후식까지 다 먹고 집을 나서려는데 그녀의 어머니께서 한 말씀하셨다. "서로 아껴주면서 예쁜 사랑하게. 서로 마음에 들면 빨리 결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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