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진 Feb 09. 2024

구의 증명 서평

사랑에 미치면


Sub 1. 소녀와 소년


둘은 어릴 적 같은 마을에서 자란 소꿉친구이다.

항상 붙어 다녔기에 동네 친구들의 음담패설의 주인공이 되기 일쑤였다.

둘은 서로에게 애틋했다.

처음에는 그저 우정으로 묶였지만, 사춘기가 찾아오면서 사랑으로 묶인다.

하지만 주변 환경은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소년과 소녀의 가정환경은 불우했고, 그들은 모종의 사건을 이유로 1년간 이별도 맞이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갈구하는 1년이 지나 그들은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따뜻한 집에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그런 해피엔딩은 없다.

아주 어두운 소설이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소설에서 쓰는 비유법처럼

이 소설도 사랑을 '먹는다'로 표현한다.


깎인 손톱과 발톱 조각은 내가 먹었다.
머리카락을 단정히 빗겨주었다.
빠진 머리카락도 내가 먹었다.
꿀꺽 삼켰다.
- 구의 증명 중


처음에는 먹는다는 표현에 굉장히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사랑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 어둡기만 했던 책의 장막이 걷히면서 핑크 색 안개가 적당히 섞이더라.

핑크가 섞이기 시작한 건 소년과 소년이 잠시 이별을 맞이했을 때이다.

서로를 원하지만 만날 수 없는 현실에 서로에 대한 애틋함만을 이야기한다.


구(소년)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가 보다.
담(소녀)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나.
- 구의 증명 중


상대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서운함이 밀려온다.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상대를 끝없이 기다린다는 뜻일까.
- 구의 증명 중


그러면서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소년은 동거하는 여자가 있지만 오직 소녀만을 생각한다.

소녀는 소년이 다른 여자와 사는 걸 알지만 오직 소년만을 생각한다.

그렇게 둘은 다시 만났다.


그것은 내 부재만큼이나 네 남은 생에 지우기 힘든 얼룩과 상처를 남길 테니까.
내가 본 마지막 세상은 너여야 했다.
- 구의 증명 중


함께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꿨지만 그저 사치였을까.

소년이 사채업자에게 맞아 죽었다.

소녀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소년을 해치지 못하게 소년의 시체를 먹었다.



Sub 2. 소녀가 소년을 먹은 이유


소녀는 어릴 적 할아버지와 이모의 손에 컸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릴 적 돌아가시고, 이모가 친딸처럼 소녀를 키웠다.

그래서 둘은 애틋했다.

소녀는 내가 크면 이모를 호강시켜 줄 것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시점은 다시 소년과 소녀가 잠시 헤어지고 1년간 방황하던 시기이다.

이모의 병세는 급격히 나빠졌다.


이모는 할아버지와 같은 병으로 죽었다.
호명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병명을 알게 되자마자 병은 금세 깊어졌다.
- 구의 증명 중


소녀의 곁에는 할아버지도, 이모도 없다.

세상에 혼자가 된 소녀의 옆에는 이제 소년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년도 세상을 떠났다.

혼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

그리고 더 이상 세상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을 자신의 안에 가두기로 했다.


섬뜩하고 어둡다.

소녀의 정신은 괜찮은지 걱정이 된다.

내가 느꼈던 감정이다.


소녀의 감정으로 대하자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이들은 이제 세상에 없다.

어린 소녀가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을까.



Sub 3. 소년이 싫다.


나는 이 소설의 소년이 싫다.

어릴 적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막대한 빚이 소년에게로 돌아갔다.

그래서 소년은 어릴 적부터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녀를 끊임없이 만났지만, 모종의 사건을 이유로 1년간 헤어진다.

그 기간 동안 소년은 공장에서 인기가 좋은 한 누나를 만나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누나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내 소녀를 생각한다.


나는 누나 마음보다 내 마음부터 알아야 했다.
내 마음... 내 마음은 담이 잘 알지.
잘 알고 짚어주지
- 구의 증명 중


둘의 재회는 소녀의 이모의 장례식에서였다.

그렇게 둘은 함께 떠났고 얼마 안 가 소년이 죽는다.

그리고 소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에 위기는 모두 소년이 제공했다.

소녀는 소년이 없었다면 평범한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아픔은 있었겠지만..

하지만 소년은 그녀를 놓아줘야 함을 알면서도 결국 놓지 못했다.

그리고 그 비극은 고스란히 남은 사람의 몫이어야만 했다.


내가 담(소녀) 이를 좋아해도 되나.
더지가 좋아하는 게 더 좋지 않나.
-구의 증명 중


심지어 소녀를 두고 다른 여자와 동거하면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은 최악이었다.


 



Sub 4. 책의 또 다른 재미


읽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챕터가 시작되는 페이지의 위에 채워진 동그라미(●)와 속이 빈 동그라미(○)가 나온다.

처음에는 왜 있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제목이 '구의 증명'이라서 동그라미가 있나..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로 진행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읽으면서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저 동그라미의 의미를 안다면 어떤 인물의 시점인지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소년과 소녀의 시점을 동그라미를 이용해 구분해 놓으니, 내용에 보다 쉽게 몰입할 수 있다.

또 저런 장치를 알아내는 재미는 플러스 요소이다.



여담으로 소녀의 비어있는 동그라미는 세상 모든 걸 잃은 그녀의 공허함을 나타내고,

소년의 꽉 찬 검은 동그라미는 죽어서 소녀에게 위로조차 해줄 수 없는 슬픔을 가득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그저 나의 뇌피셜이지만, 책을 다 읽고 의미를 생각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물을 파는 사람 서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