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 30분.
딸아이를 미술학원에 올려놓고 목적지 없이 걷는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오간다. 장바구니를 들고 가는 할머니, 강아지와 함께 어디론가 가는 여성, 학교 가방을 메고 재잘재잘 떠들며 가는 학생들이 각자 다른 표정과 다른 걸음새로 나를 스쳐 간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차오른다. 슬픈 일도 없는데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어디선가 풍겨나는 향기가 나를 붙잡는다. 무엇일까 두리번거리니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이 보인다. 그녀 옆에는 작약, 소국, 장미, 튤립, 해바라기, 리시안서스, 카네이션 등 형형색색의 꽃들의 묶음이 족히 200미터는 되어 보이는 벽돌색 고무 다라이 안에서 방긋방긋거리고 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마주친 눈을 나 몰라라 하기 미안해져, 잠시 발을 돌려 그 중년 여성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어떤 녀석이 내 코끝을 건드리는 고운 향을 가졌나 싶어 이것저것 물어본다. 거리가 조금 있었을 때는 분명 날 좀 봐달라는 듯 향을 그리 뿜어 댔으면서, 가까이 가니 얄궂게도 향을 쏙 숨겨버린다. 가던 발걸음을 돌리게 해 놓고서는 이리 애를 태우나 싶다.
좀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번엔 향이 아니라 꽃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만의 모양새와 색에 빠져든다. 활짝 선명하게 웃어대는 작은 소국을 보자니 따라 미소 짓게 되고, 강렬한 섹시미를 자랑하며 유혹하는 장미를 보니 따라 요염해지는 듯하다. 핑크 그라데이션으로 색의 향연을 뽐내는 작약은 왠지 수줍게 쳐다보는 듯 해 따라 소녀가 되고, 화사한 옷을 입고 고상한 자태를 취하고 있는 리시안서스를 보니 따라 우아한 매력의 중년이 된 듯하다.
다라이에 그냥 주저앉아 있을 아이들이 아닌데. 안타까워 몽땅 집에 데리고 가고 싶지만, 우리 집에서는 자신만의 색과 향을 잃을 것 같아 그냥 돌아선다. 잠깐 만났을 뿐인데 이유 없이 흘렀던 눈물이 싹 마른다.
이제 걸을 이유가 사라져 가까운 곳에 보이는 벤치에 잠시 앉기로 한다. 옆을 바라보니 단단하게 서 있는 나무에 붙어있는 초록 나뭇잎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흔들흔들 서로 부딪히며 찰랑찰랑 소리까지 낸다. 어서 오라며 잠시 쉬어가도 된다고 손짓하는 것 같다. 그 소리가 너무 맑고 다정해 눈을 감아본다. 따뜻한 햇살이 나를 감싸주니 눅눅했던 내 마음이 다시 뽀송해진다.
꽃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뭇잎끼리 스치며 내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내가 이렇게 이해받는 느낌이 들 수 있나 싶다. 그리고 햇살의 따뜻함과 바람의 시원함까지 온몸으로 받으니 마냥 살 것 같다. 진짜 그랬다. 문득 카페에 가서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똑같은데 카페 안은 왜 그리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있어도 있는지 몰랐던 공기, 바람, 햇살, 꽃, 나무 등 자연의 품에서 한가로이 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었나 보다.
오후 5시 30분.
딸아이를 픽업하러 가야 할 시간이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는데, 발걸음을 돌아서게 했던 꽃들과 눈이 다시 마주친다. ‘그래, 아무 얘기하지 않았는데도 나를 이토록 깊이 위로해주었는데 그냥 가면 안 되지.’ 하는 마음이 들어 다시 왔다며 인사한다.
누구를 오늘의 나의 인연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화사한 옷을 입고 우아한 매력과 상냥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리시안서스 한 다발을 품에 안는다. 덕분에 고고한 발걸음을 떼며 가야 할 곳으로 다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