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꼰대화'에 대하여
꼰대라면 한 번쯤 "나 때는 말이야~"를 말해본 적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꼰대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여러 꼰대들은 어째서 '나 때'를 애타게 찾는 걸까? 개인차는 분명 있겠지만, 나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 때'에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주로 말하는 '나 때'에는 대학원 시절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봐도 괴로움 또한 가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시기의 나는 지금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무능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열정적이었고, 삶에 충실했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지금보다 더 소중히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한 곳에 머무를 수 없다. 10년 이상 오래 머물 수는 있을지라도, 결국 언젠가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행운이다. 하지만 말 그대로 운에 맡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운이 나쁘다면 의미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세월이 지난 만큼 능력치도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지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에만 매달려 사고방식의 유연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러다 보면 '아, 옛날이여'를 되풀이하게 된다.
'나 때'를 계속 강조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내가 보기엔 '나 때'했던 만큼을 지금 후배들이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객관적이진 않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나의 관점에선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후배들이 노력을 덜 하는지는 사실 확인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노력을 안 보이는 곳에서 하고 있을 것이다. 또는 더 이상 내가 했던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환경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 올라온다. 내가 그다지 공부를 잘하거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부족함만 눈에 띈다. 실제로 후배들과 경쟁을 하게 된다면 내가 참패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땐 '꼰대화'는 어느 정도 자존감이 있는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존감이 매우 낮아져 어떻게든 보상받고자 발버둥 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내가 꼰대가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꼰대임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건 절대 아니다. 조금이나마 덜 꼰대스럽게 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없듯이, 노화에 따라오는 '꼰대화'도 막을 수 없다. 나는 건강하게 나이가 들어가기 위해선, 내가 더 이상 20대가 아님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꼰대가 되어버린 나에게 귀가 따끔한 '충고 또는 조언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나는 후배들을 만날 때 "나는 매우 꼰대야. 알고 있어"라고 말해준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나 스스로도 좀 더 말과 행동에 조심할 수 있다. 동시에 어린 시절 어른들이 내게 알려준 대로, 말을 하기 전에 세 번은 생각하고 말하려고 신경 쓴다. 진정한 대화는 말을 전달하는 게 아닌,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데서 시작한다는 걸 명심하려 노력한다.
나는 이미 꼰대가 되어버렸지만, 최대한 악화되는 걸 늦춰보려고 한다. 후배들을 지켜보면 걱정이 되지만, 그들은 내가 걱정해줘야 할 만큼 약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걱정을 받아야 하는 처지일지도 모른다. 좀 더 차분하게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 나는 그들에게 조언함으로써 무엇을 얻고 싶은가? 그저 자기만족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도와주었다는 성취감을 맛보고 싶은 건가? 이를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나를 돌아보고, 내 말을 다시 돌아보고, 귀를 열어보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분명 꼰대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