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와 허세, 자기방어.
중학생 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확히 몇 교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난 건 쉬는 시간이었고, 다음 수업은 음악 시간이었다. 나는 음악실로 향하고 있었다. 뒷문을 열고 음악실로 들어가자 한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길래 나도 쳐다봤다. "왜 쳐다보지? 무슨 용건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래 시선을 교환했다. 갑작스럽게 그 친구는 내 어깨? 가슴?을 툭 밀쳤다. 순간 당황함과 동시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뭔데?"라는 말과 함께 나도 그 친구를 툭 밀쳤다. 그랬더니 별안간 뺨을 때리는 게 아닌가. 화가 난 나도 뺨을 때리며 반격했다. 좀 더 강하게 "뭔데??"라고 말하며. 그랬더니 다음은 주먹이 날아왔고,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챈 다른 친구들이 나와 그 녀석을 떼어 놓았다. 원래부터 잇몸이 약한 편인 나는 입안 가득 퍼지는 피의 맛을 느껴야만 했다. 그 녀석과는 그 후로 말을 섞는 일이 없었다.
그 녀석과는 같이 게임도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친구'라고 부르기엔 애매할지도 모르지만, 보통 불편하게 생각하거나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과는 게임을 안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런 일이 일어나니, 나로선 당혹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먹이 날아온 건 서로 주고받는 과정에서 격해지다 보니 그랬다고 치더라도, 대체 왜 날 밀친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눈이 마주쳐서? 애초에 먼저 쳐다보지 않았던가. 눈이 마주치면 싸워야만 하는 동물의 세계도 아니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녀석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는 없고, 아마 앞으로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궁예질', 그 녀석의 마음을 내 맘대로 파악해보자면, 그 녀석의 마음에는 아마 나를 깔보는 시선이 있었을 거라고 여겨진다. 나는 소위 말해 '조용하고 수더분한 아이'였다. 소수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했다. 그 녀석은 어느 정도 '잘 나가는 아이' 그룹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사실 내 눈에는 전혀 잘 나가 보이지 않았지만, 높게 평가해서 발을 걸친 정도다. 한창 중2병이 발현하던 시기였으니, 잘 나가는 자신이 멋져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싸나 다름없던 나를 내심 무시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자신과 눈이 마주쳤는데도 눈을 '깔지' 않으니, 순간 화가 났던 게 아닐까. 정말 하찮은 가설이지만, 우리가 아직 중학생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 녀석은 '허세', '우월함' 또는 '자존심'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녀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게 이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에 화가 났을 테지. 그 녀석이 중요하게 생각하던 그 자존심을 지키려는 행동은, 나에겐 그저 '양아치스러움'에 불과했고, 따라서 나는 그 '자존심 부리기'를 매우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 내게 중요한 건 '화합'이었다. 다툼을 극도로 싫어했고, 다른 사람의 평화를 깨뜨리는 행동도 극도로 혐오했다. 그 녀석의 행동은 내 평화를 깨뜨렸고, 우리의 화합을 망가뜨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끼쳤으니, 우리는 그렇게 갈라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평화를 지키려 노력한다. 다른 사람을 내려보거나 깔아뭉개는 사람은 가능한 응징 한다. 한 가지 바라자면, 앞으로는 무력으로 다툴 일이 없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는 허세를 부리며 강한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힘들고 괴로울 때도 쿨한 척,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하며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려 한다. 어느 정도의 허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뭐든 과하거나 부족하면 탈이 나는 법. 적당하지 않은 허세는 우리 자아의 건강을 위협한다.
허세가 가장 만연한 공간은 아마 SNS일 것이다. 그곳에선 허세가 곧 매력이고, 직업이며, 경쟁력이다. FLEX 하는 모습, 취미를 즐기는 모습, 예쁘고 멋진 얼굴과 몸매를 뽐내는 모습만이 낭자한다. 허세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고, 우리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동시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기도 한다. 다른 말로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공시생이 커피를 사서 마시는 건 사치인 걸까?>
흔히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장황한 이야기도 허세스런 면이 있다. 듣다 보면 결론은 '나는 대단한 사람이었어', '나는 이런 일도 이겨냈어' 등 자신의 대단함을 뽐내는 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사실 확인을 해볼 기회가 생겨 알아보면, 굉장히 과장된 경우도 빈번하게 있다. SNS에 아기자기하게 차려놓은 브런치 사진을 감성적으로 찍어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전부 그런 건 아니겠지만, 허름한 단칸방 한구석만을 예쁘게 꾸며놓고 마치 자신이 사는 곳 전체가 잘 꾸며져 있는 것처럼 사진을 찍는 경우가 있다고도 한다.
'포르셰 효과(Porsche Effect)'라는 걸 들어본 적이 있는가? 네덜란드 대학 연구팀이 100명가량의 남성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서, 매력적인 여성 또는 평범한 여성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의 어떤 면을 더 보여주려고 하는지 살펴보았다. 남성들에게 '당신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기억해보라'라고 지시를 주었다. 평범한 여성과 함께 있을 때, 컵, 수건 등 정말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소품을 떠올렸다. 아주 매력적인 여성과 함께 있을 때는 페라리, 포르셰, 대저택 등을 떠올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남성들이 호감을 얻고 싶은 여성과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는 여성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자신의 화장기 없는 쌩얼, 무릎이 늘어난 추리닝 차림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이런 점을 노리고, 상대방을 깎아내리기 위해 남성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경쟁자의 성형사실을 밝히거나, 콤플렉스를 굳이 들춰내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점은 남성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허세는 상대를 공격하거나,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절한 허세'는 건강한 자기애의 일부가 드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적절한 허세'란 어느 정도의 허세인 걸까? 우선 과대평가가 되어선 안 된다. 달리 말하면 현실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는 '메타인지'라고 부르는, 우리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 신체적 능력, 인간관계적 능력을 부풀려서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무의식적으로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을 화려한 포장지로 포장할수록, 알맹이를 쉽게 꺼내지 못하는 법이다.
무조건 겸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허세는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주고, 자신감을 잃지 않게 해 주며,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선 유머로 활용될 수도 있다. 억지로 무리해서 허세를 부리지 말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허세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말자. 거짓말이 섞이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존감을 잃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