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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Aug 21. 2021

밤에는 별이 빛난다.

나에게 필요한 적당한 어둠

태양을 피하고 싶어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집 밖을 나오자마자 강렬한 햇빛이 내리쬔다. 화려한 조명도 아닌 게 뜨겁게 나를 감싼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힘들다. "아, 선글라스가 있으면 좋을 텐데. 양산도 있으면 좋을 텐데." 햇빛을 막아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늘이 필요하다. 어둠이 필요하다.


  '어둠이 찾아왔다'는 말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슬프거나 불쾌한 감정, 암울한 기분, 삶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둠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둠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모든 어둠이 우리를 괴롭히는 건 아니다. 빛이 있는 곳엔 늘 어둠이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겐 '적당한 어둠'이 필요하다.


  햇빛이 쨍쨍한 여름날, 맑은 하늘을 시작으로 주변 풍경을 눈에 담기 위해선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빛을 조금 줄여주는 '어둠'이 필요하다.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정'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색일 수 있다. 하늘 높이 빛나는 별과 달을 보며 우수에 젖기 위해서, 우리에겐 '밤'이 필요하다.




어두워야 비로소 보이는 것


  어둠이 불편함을 주는 건 분명하다. 깜깜한 밤에 아무런 빛도 없다면 우리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될 수도 있다. 감정적으로는 슬픔, 우울감, 절망감 등이 어둠에 해당한다. 이 감정들은 분명 우리를 괴롭힌다. 극단적으로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지 '어둠' 그 자체가 아닌, '적당한 어둠'이다. 적당한 어둠도 물론 괴롭다. 불편하다. 꺼림칙하고 거부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적당한 어둠은 좀 더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세상을 좀 더 명확하게, 좀 더 폭넓게 경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나는 니체의 이 명언을 아주 좋아한다. 시련이 찾아오더라도 '이 시련을 통해 나는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기대하게 해 준다. 니체의 철학적 사고를 모두 이해하진 못하지만, 이 한 문장 만으로 나는 좀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실패해도, 좌절해도, "다시 한번!"을 다짐하며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다.


  성공을 하기 위해 반드시 실패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실패 없이 성공하는 게 당연히 좋은 일 아닌가? 누군가는 그다지 아프지 않은 실패 정도만 하면서 성공을 이루었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실패 그 자체가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건 결코 아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로 불릴 수 있었던 까닭은, 실패와 함께 찾아온 어둠의 역할에 숨어 있다. 바로 '보지 못했던 걸 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 어둠에겐 있다.


  이러한 어둠의 역할 또는 기능은 '낙관주의의 함정'과도 관련이 있다. 많은 심리학 연구들을 통해, 낙관주의는 우리의 신체 및 정신 건강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밝혀졌다. 낙관주의의 반대는 비관주의다. 이 두 가지 관점을 비교했을 때 비관주의가 낙관주의보다 나은 점은 거의 없다. 미래의 성취, 신체 건강, 정신 건강, 인간관계 등 여러 영역을 모두 따져 봐도 낙관주의가 반드시 더 도움이 된다. 딱 한 가지, 낙관주의가 가진 함정은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세상과 우리의 삶을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조심해야 할 부분을 놓칠 수 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마치 과음하여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처럼 부주의해질 수 있다.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어떤 한계점이 있을지 고려하지 못할 수 있다. 비관주의는 이걸 가능하게 한다. 여러분들 주변 사람들 중, 혹시 매사에 비관적인 사람이 있지 않은가? 만약 그 사람에게 여러분들이 "내가 새롭게 이런 걸 해보려고 하는데"라고 말하면서 조언을 구한다면, 그들은 어떤 말을 할 것 같은가? 그 일은 왜 하면 안 되는지 10가지 이유를 댈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을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위험에 굉장히 예민한 사람들이다. 돌다리를 두세 번이 아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두드려 보고서도, 혹시나 돌이 미끄럽진 않은지 문질러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가진 '어둠을 보는 시각'은 우리가 좀 더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도와준다.




우울한 사람들의 강점


  예전에 어떤 책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에게서 전해져 내려오는 '두 마리 늑대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는데, 이 두 마리의 늑대는 늘 싸움을 한다. 한 마리는 '검은 늑대'로, 분노, 열등감, 질투, 슬픔, 후회, 억울함 등의 감정을 상징한다. 나머지 한 마리는 '하얀 늑대'로, 사랑, 희망, 겸손, 친절, 기쁨 등의 감정을 상징한다. 이 두 마리 중 어느 늑대가 이길까? 그건 바로 '우리가 먹이를 주는 늑대'다.

나는 내 마음속 검은 늑대에게 아주 오랜 시간 먹이를 주며 살아왔다. 따라서 늘 검은 늑대가 하얀 늑대를 이겼다. 특히 '우울'이라는 먹이를 가장 많이 주었다. 내 우울을 먹고 자란 검은 늑대는, 하얀 늑대를 거의 빈사 상태로 만들 만큼 강해졌다. 어느샌가 검은 늑대는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주 길고 긴 밤이 내 마음에 찾아왔다.


  다행히 내 마음속 하얀 늑대에게 '친절'과 '사랑'을 먹이로 던져 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내 마음에도 동이 트기 시작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낮과 밤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낮보다는 밤이 더 길다. 우울에 압도되어 있을 적에는 '우울한 내 모습'을 보는 게 너무 싫었다. 내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적당한 우울'로 가라앉으면서, 나는 우울에 숨겨진 강점을 볼 수 있었다.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구스타프 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울증은 어둡고 검은 옷을 입은 여인과 같다. 그녀가 나타나면 그녀를 멀리하지 마라. 차라리 그녀를 받아들여, 손님으로 대하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도록 하자.


또한, 융은 "빛의 형상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라고도 말했다. 어둠을 받아들이고, 어둠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여기서 알지 못했던 것은 '나 자신'일 수 있고, '나의 가능성'일 수 있으며, '나의 창조성'일 수도 있다. 우울감에 빠진 사람에겐 '우울 필터'가 써지고, 이 필터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우울하지 않을 일에서도 우울함을 느낀다. 한 마디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우울'을 보게 된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필터를 쓰고서 작품을 만들었다. 이에 융은 우울이 창조성을 발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고 보았다. 나는 우울했기 때문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에 이르러서 시를 쓰는 일은 내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취미가 되었다. 우울해서 시를 쓸 수 있었고, 시를 써서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사소한 경험도 굳이 의미를 부여하며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깊이 우울했기에 다른 사람의 우울도 볼 수 있다. 비록 완전히 공감해줄 수는 없을지라도, 상대방의 우울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사람의 삶을, 컬러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단 하루라도 흑백으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우울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달이 뜨는 밤이 좋다


  새까만 밤은 여전히 두렵다. 어릴 적 불을 끄고선 잠들지 못했던 나로서는 자그마한 빛이라도 필요하다. 달이 밝게 빛나는 밤은 더없이 좋다. 이제 우울에 찌들어버려서인지, 나는 낮보다 밤이 더 좋다. 밤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럴 수 있는 건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다. 달빛이 영롱하게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빛과 함께 있는 '적당한 어둠'은 아름답다. 아주 오래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렸던 '별이 빛나는 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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