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의 기억

인동덩굴

by 박민지

요즘의 사람들은 다른 감각보다 특히 시각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휴대폰이라는 작은 세상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시각은 절대적인 감각이 되어버렸다.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보면, 앞이 아닌 손에 쥔 화면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모습이 위험천만하게도 너무나 흔하다. 심지어 우리 동네에는 자전거를 타면서까지 휴대폰을 보고 가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제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기보다, 화면 속 세상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시각 다음으로 많이 쓰는 감각은 아마 청각일 것이다. 귀에는 늘 에어팟이 꽂혀 있고, 사람들은 걸으면서, 대중교통을 타면서, 음악이나 영상의 소리를 듣는다. 도시의 풍경은 이제 그렇게 눈과 귀로만 채워져 있다. 그 사이, 후각이나 미각, 촉각과 같은 다른 원초적인 감각들은 점점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감각들은 불쑥 우리의 기억을 자극하며 다시 살아나곤 한다. 특히 나에게는 향기가 그렇다. 나는 어떤 장소나 순간을 향기로 잘 기억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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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테니스 레슨을 받으러 가는 길에 익숙하면서도 뜻밖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 길목에는 인동덩굴이 담벼락을 타고 무성하게 자라는 구간이 있다. 5월이 되면 그 덩굴 위로 흰색, 귤색, 옅은 분홍색의 인동덩굴꽃이 피어나는데, 그 향이 얼마나 좋은지 연한 바닐라향에 상큼한 딸기향이 섞인 듯, 달콤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이 거리 전체에 가득 퍼진다. 초여름이면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향기에 취해 한참을 머물다가 가곤 했었다. 인동덩굴꽃의 향은 단순한 냄새가 아니라, 그 계절의 공기와 햇살, 그리고 나의 기분까지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어떤 특별한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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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10월의 마지막 날에 그 길을 지나가는데, 계절을 잊은 듯한 몇 송이의 인동덩굴꽃이 피어 있었다. 이 늦가을에, 이렇게 바보같이 계절을 실수한 친구들을 만나는 일은 가끔 있다. 그 꽃들 앞에 서서 코끝을 가까이 대고 향기를 들이마시니, 5월의 그 기분 좋은 공기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짧게 지나가는 순간이었지만, 향기 속에서 계절이 겹쳐지고,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향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크리스마스 휴가때, 포르투갈의 작은 항구 도시 파로에 갔을 때의 일이다. 파로의 항구에는 서향나무가 가로수처럼 길게 심어져있고, 서향나무는 천리향이라고도 하는데 낮이 아닌 밤에 짙은 향기를 뿜어낸다. 크리스마스날 저녁,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맛있게 하고 남편과 항구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러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서향나무의 향이 실려왔다. 그 달큰한 향은 자칫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할 법한 작은 항구도시 파로를 매력적으로 바뀌게 하는 마법이 있었다. 포르투갈 특유의 바닥모자이크, 바닷바람, 크리스마스 분위기, 작은 마을. 이 풍경의 기억은 서향나무의 꽃향기로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다.


서울의 도심에서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는 것은 뭐가 있을까, 문득 생각해보았는데 대부분은 향수나 방향제처럼 인공적인 향이 떠올랐다. 하지만 며칠 전, 어느 카페 앞을 지나가다가 신선한 자극이 느껴졌다. 문틈 사이로 퍼져나오던 커피 볶는 향이었다. 순간, 그 향이 나의 생각을 멈춰 세웠고 도시에서 우리의 후각을 깨우는 식물의 향은 이 커피 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의 향기가 거의 사라진 도시 속에서도, 가끔만나는 향기는 여전히 우리를 붙잡고, 시각과 청각에 의해 잠시나마 잊고 있던 다른 감각을 되살린다. 그리고 그 향을 따라가다보면 새로운 순간을 발견할 수도, 새로운 나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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