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에 조금 배은망덕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이 우울한 기분을 날려준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우리 뇌는 그 기억을 최우선순위로 올려놓게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뇌가 학습한 보상순위 때문에 우리는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 자동으로 음식 생각을 떠올리게 됩니다. 절대로 여러분들의 의지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우리 뇌가 그렇게 반응하도록 회로를 만들어놨기 때문이고요.
ㅡ정희원의 저속노화 '가짜 식욕 없애는 법'
우울한 기분을 날려준 케이크 같은 것들이 내게도 있었다. 엄마 등에 업혀 한쪽 귀를 대면 울림으로 전해지던 엄마 목소리나 나를 데려다주고도 한참 거두지 않던 남자친구의 시선 같은 것. 효과는 반감되고 해로운 습관이 되어버린 케이크처럼, 영원히 그대로였으면 하는 것들도 가능성과 의미가 바뀐다.
아이들을 기르며 허우적대다 마구 가라앉을 즈음, 나는 글쓰기 모임을 붙잡았었다. 켜켜이 쌓였던 것을 글로 뱉어내고 타인이 이름을 붙여주면서 나는 조금씩 어떤 강을 건너왔다,는 것을 3년 동안 그리하고 돌아보면서 깨달았다.
그 경험이 나를 송두리째 일깨웠으므로 나는 한참을 글쓰기에 매달렸다. 케이크처럼, 엄마 등이나 남자친구의 시선처럼, 글쓰기를 평생 내 것으로 매어두고 살 수 있길 바랐다.
어떤 것들의 달라진 의미를 알아채고 서서히 놓아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구슬픈 구석이 있지만 확실히 어른의 냄새가 난다. 굳이 어른이 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나이가 드는 마당이었으니까.
달리기는 지난해 5월 시작했는데, 역시 새로운 구원처럼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찌뿌둥하고 흐트러진 듯한 상태, 녹슬어가는 몸에서 오는 끊임없는 불유쾌한 신호, 이렇다 할 것이 없는 것으로 일상이 채워지는데도 여력이 없다는 못마땅함, 뭐든 내 맘 같지 않게 지지부진한 것에 대한 체념 등으로 스산할 때였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시간을 구경꾼처럼 멍하니 보면서, 그러다 보면 고맙게도 끝이 훌쩍 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언가 잠깐 욕망하다가도, 이제 와서 뭘, 하는 생각으로 쉬이 사그라뜨릴 수 있었다. 사람이 얼마나 구슬퍼지면 그렇게 되나 싶지만, 그리 된 나에 대해 더 이상 놀라지도 않을 무렵이었는데, 왜 달리기엔 홀라당 넘어갔나 모르겠다.
어쨌거나 1년 하고도 1개월 10일쯤 지나는 사이, 1100킬로미터쯤 달리는 동안, 나는 그때와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요 며칠 가만히 뒤를 돌아보면서, 달리기도 다리였나, 건너왔나, 생각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은 특별한 날이었다. (시댁이 있는) 양평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우리 가족과 시동생네 가족, 아홉 명이 다 함께 참여했다. 한 번에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고 페이스가 빨라지는 것 말고도, 이런 확장이 내겐 달리기에서 얻는 즐거움이었다.
일정이 공지되기 전에 일정을 알아보고, 신청을 받기도 전에 시동생네 식구들을 부추기고, 한두 달 전부터는 훈련해야 한다며 아이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래놓고 정작 6월이 되어 세부일정을 짜고 짐을 꾸리고 관련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는, 나는 어쩌면 그럴까 싶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달리기 연습도 하프코스를 편안히 뛸 만큼 하지 못해서 살짝 겸연쩍긴 했으나 크게 마음이 쓰이진 않았고, 당일 아침에도 긴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달리는 동안 오랜만에 힘들었지만 (역시 달리기는 정직하다) '달리다 보면 분명 도착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나에게 달리기란 무엇인가', '오늘의 달리기는 어떠한가' 류의 사유, 그리고 '시댁 식구들과 다 함께 달린다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따위의 감흥은 잘 자란 화초나 잘생긴 남편의 얼굴처럼, 어느새 아주 은근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흘러나오겠지만, 사실 내 눈엔 다른 것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다 펼쳐보지 못한 것 같은 내 날개에 어떻게 힘을 실어줄 수 있을까.
3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했던 고민을 다시 하자니 물론 기가 막혔다. 얼마 전까지 내가 할 일은 다 했고 내가 살 삶은 다 살았다고 여겼던 내가, 남은 삶을 길게 잡고 뭐라도 해야 한다고 송곳 같은 판단이 서서는 마음이 바빠진 게 웃기기도 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달리기가 내 눈앞이 아니라 등 뒤로 가 있었다. 하루에 달리기를 꼬박꼬박 새겨 넣으면서 일상의 사소한 것이 사소해졌던 것처럼, 인생에 무언가를 새로 넣으려니 다른 모든 것이 잦아든다.
달리기라는 다리를 건너 이만큼 와서, 달리기 덕분에 다른 것을 꿈꾸면서, 등 뒤로 가버린 달리기를 가만히 본다. 오늘 같은 특별 이벤트에도 동요하지 않다니, 달리기에 조금 배은망덕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이번만큼은 어쩐지 구슬프지가 않다.
꽤나 더운 날씨였는데, 주로의 반쯤이 그늘이어서 달릴 만했다. 업다운은 조금 있다. 경포마라톤만큼 자연에 폭 싸여서 달릴 수 있다. 처음 5킬로 이후로, (정확히 센 건 아니지만) 평균 2킬로미터마다 급수대가 있었다. 완주 후 얼음물에 담가놓은,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기념품으로 티셔츠와 스포츠가방을 주었는데 유용하게 쓸 만한 가방이다. 주차장을 세 곳이나 마련했고, 셔틀버스도 운영한다. 규모가 아주 크지는 않지만, 27회나 운영됐고 진행도 매끄러운, 한 번쯤 참여해볼 만한 대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