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 주차장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by VIVA

자동차 경고등이 떴다.

정규 서비스를 받으란다. 그러려니 넘어갔다.

주행 거리가 거의 없기에

추석 연휴 지나고 여유 있게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며칠 뒤 냉각수 coolant 레벨이 낮다는 경고등도 떴다.

자동차 시동을 켤 때마다

유난히 삑삑 거리는 경고음을 무시했다.

그렇게 1주일 후, 주유하는데

당장 자동차 운행을 멈추라는'Stop' 경고등이 떴다.

처음 보는 경고등이었다.

살얼음판을 기어 오듯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왔다.

정비소에 문의를 하거나 웹서치를 하거나

긴급 출동을 부르거나 하지 않고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당분간 몰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뭉개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문제를 뭉개고 앉아 있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거 같다.

개인 사업을 할 때는 회사의 이익과 직원들의 월급을 채우기 위해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고

문제가 생겨도 즉각 어떻게든 해결하려 행동했는데

그때의 날다람쥐는 어언 옛날 옛적 이야기고...


지금은 즉각적으로 처리하는 대신

문제가 왜 생겼는지부터 생각한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 타고 있으면

불부터 꺼야 하는 게 순서일 텐데

나는 불이 어디서 날아왔고 왜 나를 겨냥했는지

불의 출발지와 내 다리의 거리와 불의 속도를 분석한다.

그러다 보면 발등의 불은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올라가 버린다.

그러면 마지못해 '끄응' 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밥 차려 먹기 조차도 귀찮아

배고프면 누워서 에너지 초절전 모드로 들어가고

그렇게 완전히 방전되기 직전에 겨우 물 한 모금 마시는

극강의 백수가 되어 버렸다.

무기력의 최고점을 찍고 있다.

감정과 마음의 씀씀이도 최대한 아끼고 있다.

나에게 감정을 쓴다는 건

에너지 효율 등급 1등급짜리 가전제품이

갑자기 5등급이 되어 집안 전체가

암흑이 되는 순간 누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최대한의 절전하며 서바이벌 모드 가동 중이다.


유튜브 스크립을 완성한 지 3일이 지났는데

촬영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울과 무기력의 악순환이 계속이다.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는 또 다른 페르소나이기에

글을 쓸 때는 나름의 형식과 예의를 갖추지만

이 글만큼은 그 조차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허망함이 들까...


아침에 겨우 눈을 뜨고 책상에 앉았다.

아침에 내린 커피로 서재에 커피 향이 가득하다.

'정신 차리자' 커피를 마시며

'냉각수' ' 냉각수 교체' '냉각수 경고등' '부동액'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의견과 조언이 나왔다.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 센터까지 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엔진에서 연기가 나고 불이 날 수도 있으니까

(최악을 생각하는 게 어찌 이렇게 버릇이 되었는지)

냉각수 셀프 교체하는 법을 찾았다.

기존의 사용하던 냉각수를 넣야 한다고 해서

순정액도 찾았다. 구매 버튼을 누를까 하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을 듯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일전에 워셔액을 셀프 보충한 이력이 있던지라

보네트를 여는 것쯤이야 하면서 레버를 잡아당겼다.

'어라....'

보네트가 열리지 않는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 허리를 숙여 레버가 당겨도

보네트의 '쿵'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질 않는다.

차 앞으로 가서 손바닥으로 차 뚜껑을 쾅쾅 두들겨 보기도 하고

다시 운전석으로 와서 잡아당기고 몇 번을 하다가

자동차 타이어를 발로 찼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았다.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버겁다. 자동차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다.

지겹다. 뭐든 혼자 해결하는 삶이.

생계를 버텨내는 내 삶이 처량해진다.

다 던져 버리고 싶고 다 부숴 버리고 싶다고

내적 자아가 아우성친다.

그 아우성이 소리 없는 눈물로 쏟아져 내린다.




'오래 잘 타셨네요, 어휴, 이 정도면 관리 엄청 잘하신 거예요.

이건 케이블 교체하면 괜찮아요'

급하게 알아본 동네 정비소 사장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몇 번의 손놀림으로 보네트가 '쿵' 소리를 내며 열린다.

부동액을 채우고 엔진을 가동하자 경고등이 사라졌다.

3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열흘도 넘게 뭉개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결제하기 위해 정비소 사무실로 이동했다.

정비소 사무실에서도 정비소와 같은 냄새가 난다.

기름 냄새, 철 냄새, 정비소 사장님에게 나는 땀 냄새..

어렸을 때 나던 부모님 공장 냄새다.

그토록 싫었던 그 냄새가 묘하게 내 마음을 안정시킨다.

매연 냄새가 그리워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나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지인은 이 기름 냄새도 이해하지 못하겠지.


차를 집 지하 주차장에 두고 엔진을 껐다.

잠시 지나자 자동차 불도 꺼지고 주차장의 센서등도 꺼졌다.

한 숨이 길게 나왔다.

밀어냈던 기억들이 이렇게 건강하지 못할 때 불쑥 고개를 내민다.


미치도록 끊어버리고 싶은 연결고리

'나를 왜 낳아, 내가 세상에 나오고 싶다고 나온 거야?'

이렇게 소리 지르며 따지고 싶었던 무수한 순간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완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자신에게 농약이 든 요구르트를 건넨 엄마에게,

살기 어려워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에게

집안을 망가트리며 울며 악다구니를 하는 어른 완이의 처절한 장면을

얼마나 자주 보고 울었는지....


나도 어린아이처럼 떼쓰고 사춘기 중2병 걸린 청소년처럼

밑도 끝도 없이 소리 지르고 반항하면서 부모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면

지금 나는 홀가분하게 살고 있을까?


일찍 어른이 되고 묵묵하게 참아낸 시간 속에서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내 속의 어린아이가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서 홀로 울고 있었다.


주먹 쥐고 눈물을 닦는다. 꾸역꾸역 다시 참는다.

인생은 해석이다. 그런 날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거다.

오늘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과거의 해석 또한 불만스러워진다.

나의 오늘 하루를 구원하자. 구원해야 만 한다.

나는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차에서 내려

지하 주차장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는 햇빛이 가득한 지상의 정원으로 나왔다.

해가 참 좋다.

이전 16화한 시절이 또 이렇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