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후련한 복수
너를 가장 지질한 인물로 만들어 주겠어!
사람 사는 이야기를 쓴다 하니
이러 저러한 사람들이 소재 삼으라며
자발적으로 먼저 말을 꺼낸다.
대부분은 다 자신들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 아니야'라며 굳이 애써 강조하지만
내 귀에는 '응, 네 이야기구나'라고 들린다.
구구절절 생생한 감정으로 미루어 보아
내 생각이 틀림없다.
듣는 나에게 누구의 이야기든
큰 상관없기에 커다란 가치 판단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는다.
듣다 보면 역대급 에피소드도 있다.
'드라마는 아무것도 아냐'라고
자신의 현실이 얼마나 막장이고 폭탄급인지
우쭐(?)해 하면서감정과 스토리를
부풀리는 사람도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부모님과 친척 어른들, 내 형제자매들에게
나에게 지극히 평범한 삶을 주신 것에 감사할 정도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이야기로 재가공되기 원한다.
누구든 주인공의 삶을 원하지,
서브 인물의 삶을 원치 않는다.
서브 인물조차 자신의 삶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인 거다.
또한 그들의 이야기는
자비로 자서전을 출판하기로
맘먹은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대필작가에게 풀어놓는
그들의 ' 한 많은 인생'에는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뿐이다.
그들의 흥망성쇠와 희로애락에는
오직 자신의 감정밖에 없다.
그 일로 상대가 어찌 되었는지는 빠져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꼭 확인하고 싶어한다.
'끝내주지 않냐?''감동적이지?' '재밌지?'
드라마는 치고받고 주고받는
우연과 필연의 범벅 이건만
그들의 모노드라마를 듣고 있다 보면
오늘 택배는 언제 오나 하며
딴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보다 서브 인물,
특히 악인이 고프다.
갈등 회피 성향이 짙은 나에게
내 삶에 '드라마' 같은 사건은 다행으로 없다.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지만
모든 걸 상상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기존의 작품 속에서 악인 공부를 하는 편이다.
그날도 누군가의 부풀려진
자전적 에피소드를 듣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이
' 이거 꼭 써봐!'라며 잘 되면 밥 사라 했다.
나는 심드렁한 속내를 숨기고
눈웃음을 보이기만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찰나,
창 밖으로 언젠가 봤던 사람인듯한 실루엣이
쓰윽 지나갔다.
누구지....?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후딱 나와
뒷모습을 확인했다.
팔자로 걷는 모습 하며
기다란 자라목 하며
넓지만 굽은 어깨 하며...
나는 입으로 손을 막았다.
우연과 필연의 범벅이란 건 이런 순간일까?
악인열전으로 고심하던 내 눈앞에
기억에서 삭제되었던 지질한 인간 표본이 지나갔다.
영사기가 돌아가듯, 에피소드가
그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좌르르 펼쳐졌다.
지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뭐야? 아는 사람이야? '
나는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딱'소리를 내며
음흉하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 왜 저래?' 하고 다들 궁금해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짜릿했다. 내 인생에도 악인이 있었구나.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도어 슬램 해 버리면
기억까지 다 밀어 내 버리는 성격 덕분에
정신 건강하게 잘 살기는 했는데...
그날 밤, 창고에 처박혀 있는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속에서 일기장을 펼쳐 도어 슬램으로
내 기억에서 쫓겨났던 군상들을 소환했다.
민망했다. 누가 볼까 창피한 기록과 기억들.
'이걸 진짜 내가 썼다고?'
'내가 진짜 이랬다고?'
기록을 믿을까? 기억을 믿을까?
기록이 이겼다!
나는 타인의 일기를 몰래 보듯
내 일기장을 숨죽여 읽었다.
내 인생도 막장 비스므레 했다.
그날 오후에 뒷모습만으로도 바로 알아본
그 인간에 대한 기록이 우루루루 쏟아져 내렸다.
내 존재를 부정한 그의 흔적이 볼펜 똥으로 낭자했다.
판도라의 상자였다.
기록으로 기억과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누르고 눌렀던 복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드라마든 웹소설이든 너를 반드시!'
머리 풀어헤친 망나니 같은 감정의 찌그러기가
여러 에피소드로, 하나의 서사로 연결되기를 기대한다.
그는 내 이야기에서 주인공에 비등하는
악인 감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지질하고 구질하고
비겁한 인간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지금 이 감정 계속 간다면,
모든 나의 이야기 속 지질한 인간은
그에게로 귀결될 것이다.
칼 대신 펜을 든다.
우아한 복수가 손끝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