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와 글쓰기
자아 형성과 발견에는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은 크게 두 개의 시선이 있다. 나를 잘 안다고 여겨지는 친분 관계의 시선과, 나를 일과 능력과 사회적 지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마 친분의 관계는 좀 더 인성과 감정적인 평가가 나올 것이고, 후자의 시선은 좀 더 능률과 결과에 대한 평가가 집중될 것이다. 때로는 사회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억울하고 힘들더라도, 나의 친분 관계, 가장 가까운 친구, 부부, 가족, 부모님의 시선이 따듯하다면 순간 흔들릴지라도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나의 삶에 깊게 감정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1차적인 사회관계에서 존재의 인정과 삶의 안정을 받지 못하고 어른이 된 경우, 마치 모두가 피해자인 양 슬픈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비약의 발전을 하거나 사회적인 큰 성공을 거두어 어린 시절을 결핍을 스스로 메꾸고 주변에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다.
카프카는 이 두 가지 시선에서 안타깝게도 자신의 1차적인 사회관계에만 매우 집중했다. 타인의 칭찬과 사회적인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가 튼튼하지 않아, 쉽게 흔들리는 유약한 영혼이랄까, 유연시절 부모님에게 받은 무시와 억압을 이겨내지 못했다. 이런 불안한 자아상으로 사회 외부의 자극과 관계에 매우 민감했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는 경우에 타인의 애정을 받으면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 든다.”
알랭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 번역 정영목
자존감은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감정이다. 자신이 스스로 사랑받을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타인의 사랑도 사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카프카는 인정욕구,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강했지만,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존심이 강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기만의 동굴을 찾아 들어가는 회피성향이었다. 세세상과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격지심은 실제로 죄책감에서 많이 기인한다. 실제로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생기는 미안함이 적절하게 보상받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할 때 일어난다. 특히나 유아기 때 부모가 내준 수행과제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거기에 대한 부모의 반응이 부정적일 때 자신에 대한 단순한 실망을 너머 자아상이 매우 낮게 형성된다. 자신을 둘러싼 부정적인 환경과 거기에 따른 자기 반응이 잘못된 인관관계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자신이 이룬 부와 거기에 따른 편안함을 카프카에게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제공한 것이 아니라 카프카가 자신처럼 강인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기 원하는 조건부적인 희망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카프카가 사춘기를 거치면서 카프카의 아버지는 무한한 사랑이 아닌 당근과 채찍으로 카프카를 교육했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예민한 카프카는 아버지가 바라는 강한 아들이 되지 못한 데에 가슴 깊이 죄책감을 느꼈다. 도망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던 카프카는 결국 이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문학이라는 동굴로 들어갔다.
카프카의 이러한 행동을 강박과 집착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자존감이 허약하면 무엇인가 하나에 매달리기 쉽다. 삶의 다양한 문제와 스트레스를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해 버리고 그것만 해결하면 될 것처럼 현재의 불안을 그 문제 탓을 하는 것이다. 해결 가능한 문제를 원인에 두면 좋겠지만, 대부분 이런 유의 문제는 해결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치 그 문제 하나로 현재 자신의 어려움이 당연하다는 듯이 합리화를 한다. 소셜 미미디어의 수많은 동기 부여 영상이 공통적으로 부르짖는 게 '남탓하지 마라' 아니던가. 그걸 문제로 보는 순간 문제인 거고, 추억이나 지나간 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기까지는 많이 아프고 바닥을 치는 순간과 어두운 터널을 건너와야 한다. 하지만 너무 어두운 터널에만 있으면 빛에 너무 예민해져서 현실 부적응자가 될 수도 있다. 내 주변에는 초등학생 때의 일을 지금까지도 우려 먹으며 현실비탄 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의 아픔을 들어주고 해결 방안을 마련해 주고 많은 것을 제안했지만, 오랜 상담 끝에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은 변하고 싶지 않은 거다. 현실의 비참함과 자신의 무능함의 원인을 해결해 제거해 버리면 자신의 민낯, 현실의 초라함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그 사람과 정서적 손절을 했다. 단지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아예 그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랬더니 저절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정리가 되었다.
다시 카프카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카프카는 현생을 과거의 탓으로 돌리지는 않았다. 집착과 강박적인 성격을 글쓰기로 해소하면서 그의 아픔은 예술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거의 강박적으로 글에 매달렸다. 자신이 정한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는 게 글이었다. 그 외의 것은 자신이 통제 불가능한 영역으로 잠정적으로 두고 오직 자신의 의지와 열정과 아픔을 글에 쏟아냈다. 그는 회피가 아닌 해방을 선택했다. 자신의 영혼에 아버지의 그림자를 거두기 위해, 자기 자신만의 정체성을 문학이라는 예술에서 찾기 위해 글을 썼다. 그 결과 우리는 그의 예술 작품을 어디서나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그의 소셜 미디어에 가서 좋은 작품 고맙다고 댓글이라도 남길 텐데. 자기 행복과 맞바꾼 작품에 감사의 말 더해 줄텐데. 그의 고뇌와 고독으로 인간의 다양한 면을 이해하고 삶알 바라볼 수 있었다고 전할 텐데....
그의 삶을 돌아볼 때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만약 그가 조금은 당당하고 조금은 뻔뻔했다면 어땠을까? ‘뻔뻔하다’다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운 일을 하고서도 태연하게 창피해하지 않는 태도다.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어감이 강한 표현이지만, 여리고 아슬아슬한 그의 영혼에 뻔뻔함이 딱 한 스푼이라도 더해졌다면 조금은 다른 결의 작품이 나왔을까? 그가 조금은 행복한 삶을 누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