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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24. 2024

왜 하필이면 벌레일까?

역행한 진화론


    1859년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다. 종의 기원은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을 뒤집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진화론을 사탄취급하는 종교단체나 진화론을 학교에서 금지서로 지정한 지역도 있다. 그럴 만도 한 게 2천 년 넘게 인간이 신의 창조물이 아닌 무질서한 원자들이 이합집산하며 진화 발전해서 결국 인간이 되었다니, 신의 창조물도 아니고 신의 개입도 없는 동물의 발전단계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인간은 지능을 가진 동물이며 원숭이의 친족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유전자의 공유가 있으며 진화론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진화론뿐만 아니라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은  괴짜 정도가 아닌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진화론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진화론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대한 커다란 관점의 전환을 가져왔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었던 당시 유럽은 매우 경직된 계급사회였다. 정신의 혁명이라 평가받는 프랑스혁명으로 민주주의와 개인의 인권이 향상되었다 해도 중세시대부터 유지되는 보이지 않는 계급 장막은 여전히 두터웠고 사회 계층의 구분도 확연했다. 산업혁명은 물질의 혁명이었다. 이를 통해 사회 계층의 이동이 수월해지고 인간 사회 구조가 시시각각 바뀌면서 인간 사회는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신의 소명도, 천부적인 계급도 풀쩍 넘어 지금 현생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건너뛰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대, 능력 주의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여기에 진화론은 경쟁적 산업시대에 너무나도 적합한 이론으로 정당화되었다. 출생과 부모의 계급으로 사회 계층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모두가 경쟁하고 진화 또는 도태되는 사회 구조로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나고 도태되어 사회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압박이 심해졌다. 적자생존은 초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에 대한 믿음과 윤리가 사라진 자리를 메우기 시작했다.  사회적 신분 상승이 진화 발전이라는 믿음 하에  이러한 사회적 신분 상승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자본 즉, 돈에 의해 가능해지는 물질 만능의 시대가 된다.    


    인간이 단순세포에서 다세포로, 하등 동물에서 고등 동물로 진화단계의 가장 위 부분을 차지한다는 생각이 팽배하던 때에 카프카는 인간의 기능이 조금 저하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벌레로 변하는 이야기를 썼다. 카프카는 인간과 친근한 강아지도 아니고 많은 사람이 징그럽게 여기는 벌레로 주인공을 변신 킨다. 왜, 하필이면 벌레였을까?

    벌레는 가장 하찮은 생명체로 여겨진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신자가 아닌 이상, 벌레 쉽게 죽이지 않나?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약품 뿌려 신경을 마비시켜 죽이든, 뭐든 손에 잡히는 걸로 때려죽이든 죄책감 하나 생기지 않는 하등의 존재가 벌레다. 과학에서는 익충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벌레 하면 징그럽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고,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다. 있어도 없어도 존재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게 벌레다. 눈에만 띄지 않으면 된다.  ‘벌레만도 못한 놈’, ‘벌레 보듯 한다.’, ‘벌레 취급’이라는 말도 있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는 어찌 보면 아주 심한 모욕이다. 관계에서 철저히 소외되거나 통상적인 상식이나 감정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벌레 취급한다. 요즘 뜸해지기는 했지만 한때 ~ 충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정말 단어들이 나는 소름 끼쳤다. 아무리 쉽게 별 의미 없이 던지는 말이라 해도 인간을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벌레를 뜻하는 접미어를 사용하나 싶었다.


 <변신>에 등장하는 벌레의 독일어 원문에는 Ungeziefer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해충, 조류, 동물까지 포함된 유해 생물을 포괄하는 단어다. 작품을 보면 주인공 그레고어가 벌레로 변하면서 몸이 축소된 것은 아니다. 크기는 그대로다. 외형만 '징그럽게' 벌레로 변한 거다. 카프카는 변신의 초판을 낼 때 출판사에 직접 편지를 썼다.


“곤충 그 자체를 그리지 마십시오, 멀리서도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변신> 초판의 표지는 문 뒤는 검은색 배경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한 남자가 머리를 쥐어 싸고 문 앞으로 걸어 나온다. 문 뒤에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어가 있는 것으로 상상된다. 카프카는 독자가 벌레의 형태를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배려(?) 했다. 작품 초반에 벌레로 변해버린 모습이 잘 묘사가 된다.


벌레로 변해 버린 그레고어는 아침에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가기 싫은 방판을 나설 필요도 없었다. 온갖 스트레스와 업무 압박에 스스로 벌레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걸까 아니면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도태되어 버린 존재를 묘사한 것일까? 카프카의 의도는 진화론의 발전과 진보의 반대 방향으로 인간을 퇴화시킨 것이다. 왜 퇴화했을까? 무한 경쟁 사회에서 버티지 못하고 튕겨 나온 존재를 보이려고 했을까? 그레고어가 선택한 걸까 아니면 어떤 마법에 의해 그렇게 된 걸까? 인간 소외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들의 이야기, 궁금증과 호기심과 껄끄러움으로 <변신>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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