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VA Oct 24. 2024

숫자 3,2 그리고 1

숫자로 풀어 보는 변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따른 문화적 상징을 해석하는걸 수비학이라고 한다. 수비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는 일종의 B급 지식으로 알려져 있고 특히 신비주의나 오컬트에 자주 사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숫자의 의미는 우리 실생활에 의외로 곳곳에 발견된다. 그런 의미에서 변신을 3과 2와 1의 숫자로 풀어볼까 한다. 


숫자 3

    숫자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초의 완성을 이루는 숫자로 여겨진다. 0 이 무의 세계이며  거기에 1이라는 최초의 숫자 그리고 2라는 양극의 직선의 숫자 그리고 3이라는 최초의 평면이 만들어지는 숫자가 3이다. 선을 이어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 수 있다. 인간세계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안정된 숫자라고 말한다. ㄷ동양에서는 음양사상에 따라 1을 최초의 양수, 2를 최초의 음수로 음과 양이 합쳐진 3을 매우 안정된 합일의 숫자로 본다. 삼박자, 삼세판, 삼천리 금수강산, 만세 삼창 등 숫자 3을 길한 완성의 최종적인 숫자로 보는 경향이 매우 강한다.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성삼위일체, 동방박사 3인, 로마의 삼두정치, 헤겔의 변증법인 정반합, 과거·현재· 미래, 생각·말 ·행동, 정신· 육체 ·영혼 등  숫자 3의 조합은 인간과 신의 세계가 합치가 되어 다시 완전체로 돌아가는 신성의 숫자로  여긴다. 여기에  3의 배수인 3, 6, 9, 12 또한 자주 발견되는데, 특히 12는 3에 3을 3번 더한 완벽한 숫자로 여깁니다. 기독교의 12제자, 12개월, 12개의 별자리 12 (동양의 12 지신) 가있다.  그런데 여기에 1을 더하면 이 완벽함을 잡치는 불길한 숫자로 본다. 서양문화권에서 13을 호텔, 병원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13일의 금요일이라는 미신도 있고 동양어권에서는 3에 1을 더한 4는 죽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숫자 4는 죽을 사死자와 음가가 같아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3은 어떻게 적용되고 해석될까? 이 작품은 총 3부로 되어 있다. 이 3이라는 숫자는 벌레로 변해 버린 그 레오어가 방에서 나왔다가 들어가는 시도를 한 횟수이기도 하다. 그리고 네 명의 가족 구성원에서 그레고어가 사라지고 3명이 남는다. 그레고어가 더는 역할을 하지 못하자, 그는 잉여의 존재가 되고 만다. 그의 존재는 쓸모 없어지고 필요도 없는 하나의 짐덩어리가 되어 버려 '저것' 때문에 가족이 불행해진다고 온갖 비난과 탓을 받게 되어, 최종적으로 이들이 원하는 완벽한 3인의 안정된 가족으로 남는다. 


숫자 2

    숫자 2는 직선의 수이며 양극의 숫자다. 인간 세상의 상대적인 숫자이기도 하다. 흑백의 숫자이기도 하고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의 숫자다. 숫자 2는 그래서 팽팽한 긴장을 일으킨다. 선으로 가르고 나누고 명확하게 구분을 한다. 숫자 2는 동양의 돌고 도는 윤회사상과 달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기독교적 삶의 모습이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향해 달려가는 직선 코스다. 숫자 2는 자주 위험하다. 내편과 네 편 그리고 흑백논리로 구분하여 극단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주장하며 회색이라는 중립 지대가 생기면 그들을 박쥐 또는 회색분자라고 몰아세우기도 한다. 이렇듯 숫자 2는 긴장과 갈등을 내포한 숫자다. 여기에 하나가 더해지면 조화가 되는 것이고 여기서 하나가 제외되면 1일 독재자가 된다. 


    변신의 공간은 주인공의 방과 방이 제외된 나머지 집으로 구분된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자기 방에 있을 그의 심리에 집중하여 묘사되고, 주인공이 자기 방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 방에서 나가는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이 나온다.  가족이 함께 하는 공간, 집에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는 건 사실, 부모님에게 등짝 맞을 짓이며 또한 강한 반항과 단절의 의미이기도 하다. 아무리 자기만의 방에 사생활의 개인 영역이 있다 하더라도 공간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건 가족이라기보다는 하숙인 또는 임대인의 삶이다. 그레고어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방문을 잠근다. 누군가와 그레고어와 소통을 하려면 노크를 하고 밖에서 이야기를 하든가 양해를 구해서 문을 열도록 부탁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의 원인이 작품에서는 그레고어가 출장이 잦은 직업상의 특징으로 호텔에서 지내는 습관으로 인한 것이라 말하지만, 작품을 계속 읽다 보면 이 행동은 가족을 향한 불만의 표출이라 해석된다. 적극적인 표현방식은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기면 의도적으로 방문이 잠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부터 그레고어의 마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습관과 수동적인 모습 때문에 그가 벌레로 변신하고 나서 매우 난처한 사항에 빠진 게 된다. 숫자 2는 힘이 팽팽하게 작용하면서 언제든지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는 불균형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갈등이 복병처럼 숨어 있는 숫자다. 힘의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늘 상대적이며 중간이 없기에 이거 아니면 저것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하게 만드는 숫자입니다. 모든 개념은 반대의 개념이 존재하며 반드시 반대의 개념 없이 있어야만 존재 가능한 것이 인간의 세상이다. 그래서 숫자 2는 인간 세상의 시작을 알린다. 성경의 아담과 이브, 두 가지 다른 성인 남성과 여성의 시작을 알린다. 인간 세상은 상대적이고 관계로 이루어진다. 나와 너, 너와 나, 나를 비추어 주는 상대가 있어야 내가 보인다는 사회학적 이론도 숫자 2에서 출발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숫자 2의 세상에서는  이 두 공간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 가족과 주인공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암울한 대립이 보인다. 


숫자 1 

카프카 < 변신>의 주인공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주인공, 여동생 총 4명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철저하게 혼자다.  장남이자 오빠로 몰락한 가족을 부양하고 여동생에게 정서적 애착을 느낀다. 여동생도 오빠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오빠가 벌레로 변하기 전 여동생이 벌레, 요즘 말하는 등골브레이커였다. 별 다른 일 없이 예쁘게 차려입고 외출하거나 바이올린을 연습하는 게 아니라 만지작 거리는 게 전부였던 존재, 그 텅 빈 존재를 허세와 허영으로 차려 과하게 부풀어 오르고 싶었던 존재. 하지만 그 존재는 자신을 아껴주었던 오빠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등을 돌리게 만드는 주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레고어는 완벽하게 혼자 남게 된다.  4라는 불완전의 숫자에서 하나를 빼어 완벽한 3이 되고 하나를 남겨두는 형국이 된다. 


. 숫자 1은  절대자, 독재자, 완전체, 통일 , 1 등등을 상징하지만 변신에서는 관계에서 소외된 홀로 떨어진 존재를 상징한다. 주인공 그레고어는 가족 내에서 역할을 수행했을 때는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 스스로도 생각하고 가족도 그나마 그를 인정한다. 하지만 벌레로 변신한 이후로는 가족 공동체라는 완전한 퍼즐 조각의 일부가 아니라 쓸모없는 잉여 물로 여겨진다. 여기에 맞추어도 저기에 맞추어도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맞지 않는 조각일 뿐이다. 장난감 공장에서 실수로 포장되어 쓰레기통으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쓸모없는 퍼즐 조각처럼 말이다. 객체는 전체를 떠나면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레고어는 가족과 함께 할 때는 가장이라는 역할과 책임을 지녔지만 가족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존재를 가족이 새롭게 인식하고 받아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가족은 그레고어를 철저히 외톨이로 만들고 그레고어의 작은 항변조차 무시하고 홀로 사방이 막힌 방안에 갇혀 버리고 만다. 

이전 08화 누구나 벌레가 될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