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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Apr 11. 2020

인간관계로 불안할 때

마음의 성장이란 무기한 레이스임을 되뇌기


학창 시절, 10대 초중반엔 어떤 상황이나 말, 사람에게 의미를 두는 일을 좋아했었다. 특정 사람에게 몰두하고 집중하는 일을 상당히 즐겼는데, 아마도 마음 둘 곳이 필요했던 것 같다.
불안했던 가정환경이 슬슬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지만 나도 사춘기를 지나기 직전의 나이었으니 불안한 자아였던 게 당연했으리라. 이제는 그때의 불안을 성장통 중 하나로 가볍게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렇게 친구들의 사랑을 한껏 누리고 싶어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욕심쟁이였음에 틀림없다.
조금 부러운 점이 있다면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고 원하는 것에 다가갈 줄 아는 추진력과 솔직함,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정도. 비록 덜 익은, 자라나는 중의 인간이었지만 저 두 특징이 또렷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선명한 성격적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는, 미완성이지만 어느 때보다 선명했음을 잠시간 새겨본다.

보통의 사춘기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 나 또한 그 시절에 친구 하나에게 꽂히면 내 감정만 크게 보이는 나머지 거리를 능숙히 조절하지 못하고 집요하게 그 감정에 시달렸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그 친구를 의도치 않게 괴롭게 만들어, 곤란하게 한 적도 있었다. 가령 그 친구가 다른 친구를 더 가까이하면 서운함을 티 낸다던지 하는 유치한 행동을 했다.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될 것을. 온전한 내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그때는 당연히 몰랐었고 그 이후로 꽤 긴 시간 동안도 그랬으니까.

어렸던 그때는 그런 집요함들이 당연했던 행동이라고 합리화를 했던 적도 있다. 상대방의 마음이 나와 당연히 같아야 한다고 마치 어린 꼰대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 지금은 미성숙한 시기의 시행착오 정도라 생각해두고 싶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숨길 수가 없다. 그 시절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친구가 왜 그리 야속했을까.
착했던 친구는 처음에는 나를 위한 변명을 하다가 나중엔 자신이 더 잘해보겠노라며 나의 그런 고집을 감싸줬었다. 다행히도 따뜻한 친구였다.


거리를 조절하는 법을 처음부터 잘 알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태생적으로 혹은 자라며 학습된 성향부터 나와 다른-보드랍고 능숙하며 편안한-인간형들을 보면 그 또한 질투심이 일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이중적인 감정이 들곤 했다.

참 피곤한 감정들을 부지런히 담아서 짊어지고 다녔던 학창 시절이었다. 어렸던 시절이니 체력까지 좋아서 양도 많았지만, 깊이도 깊어 하나씩 꺼내 살피다 보면 어느새 새벽이 훌쩍 지나있었다.


많은 시행착오 덕분에 고등학교 즈음부터는 그때보다 담백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욕심을 내려놓자 거짓말처럼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원하는 만큼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를 버틸 수 있었던 소중한 이들을 얻게 되었다. 참 그러고 보면 난 인생에서 거저 얻는 것은 없는 사람이다. 노력하는 만큼 딱 그 정도의 효율만이 존재해서 덕분에 그만큼의 소중함을 잘 알게 되었다 자신한다.

엄마가 없었던, 그리고 가장 가까운 어른들에게 배신감으로 치를 떨어야 했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사람들. 인생의 암흑기였던-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암흑도 그런 암흑이 없었다-20대 대학 시절도 아마 그들을 빼놓고 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버텨낸 나 자신도 고생했음은 틀림없지만, 나 자신 하나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 틈이 너무 깊어 자꾸만 다른 이들을 그 속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 됐다. 금이 간 벽이 무너져버릴지 몰라 언제나 초조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스스로 안정감을 찾아야 했다. 그들을 결코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그때의 나에게는 절실한 한 사람 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느낀다. 일정한 거리 유지의 필요성. 그 대상이 상대방이 되든 나 자신이 되든 삶에 있어 가장 효율적인 위치를 찾아가며 유동적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관계의 능률이 떨어지는 일들을 수도 없이 겪었다.

20대 때도 꽤 늘었다 생각했지만, 역시 서툰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대신 젊음이 재산일 때니 남아도는 체력과 깡으로 자신의 고집을 믿으며 때론 아집일지라도 틀렸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 우직함을 표방하여 고집스레 서있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과 위로에 목말라하고, 그들이 없으면 못 버틸지도 모른다는 강박도 있었다.  어쩌면 너무 불안한 시기여서 나 스스로가 흔들리는 일이 다른 이들로 인해 결정된다고 여겼던 것 같기도 하다.


그 후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체력이 모자라게 되자 힘을 빼고 적당한 거리 찾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이 정신적 체력이든 육체적 체력이든, 체력이 없어진 자리를 요령이 대신 차지하고나니 어느 정도 긴장감이 풀리고 유연 해지는 나 자신과 마주 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지만 여전히 남은 과제들이 그 너머에 드러나기 시작함을 느낀다. 한큐에 해결하려는 오만은 이제는 더 이상 없다. 하나가 해결되고 나면, 보란 듯 저 멀리 안개 속에 묻힌 또 다른 과제들이 드러날 것임을 아니까. 마음의 성장에 관련된 모든 사명은 신체의 성숙에 비할 수 없는 무기한 레이스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것이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일은 자신에게 지는 일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가는 것이 정답이고 멋진 것이라, 진실된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거저 얻는 것은 없다. 만약 난 의식하지 않아도 그 과정이 너무 쉬운데? 하는 이들이 있다면, 당신의 의식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이 분명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마음도 연습이 필요하고, 관계에도 시행착오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 너무 아플 때도 있지만 받아들여 다시 나아가는 회복성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스스로를 지켜볼 타이밍을 놓치며 눈치만 보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냥 흐르는 물에 흘러가듯 살면 그 어떤 고통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 스스로를 컨트롤하고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지난 장면들에 대한 후회,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 더욱 공허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허울 같으면서 동시에 나를 지탱하는 원동력이기도 한 또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는 삶. 평생 혼자 살아가는 삶이 아니므로 계속 연습해 나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 과정을 즐기며 살아가고 싶다. 그런 용기를 나 스스로에게 주고 싶다. 나를 포함한 내 존재의 구성원들과 각자의 걸음에 더한 따뜻한 시선으로 긴 여정을 함께하고 싶다.
조금 실패하면 어떠한가. 아직 나 자신과의 거리 조절에도 서툰걸. 긴 삶을 조금 여유 있는 템포로 가져가자 되뇐다.


조급해하지 말자. 자신의 속도를 믿어보자. 하고 스스로에게 이야기도 할 줄 알게 된 것을 보면 지금 그때보다는 많이 자라났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이 정도 속도라면 잘 해내고 있는 거라 스스로를 안아주자. 그리고 다시 툭툭 털어내고 천천히 배워나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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