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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asonAbility Mar 18. 2019

당연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우리에겐 말랑말랑한 흔들림이 필요해

    

작품명   :   정물 작가   :   도상봉 ( 都相鳳 ) 제작년도   : 1971 년 재질   :   캔버스에 유채 규격   : 53×72.5 cm 개인 소장

예전에 미술품 감정에 관한 강의를 들을 때였다.


강사는 작가의 서명으로 감정을 하는 경우로  '도상봉'작가의 서명을 예로 들었다. 우리나라 1세대 서양화가로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낸 정물화를 그려낸 작가.

백자를 좋아하는 김환기 작가와 도자기에 대해 이야기하다 밤을 새운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도상봉 작가의 작품에서 서명 알파벳의 간격, 글자 크기, 영문 성과 이름의 배치 등 서명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도상봉 작가는 'To. SangBong'으로 자주 서명을 했는데, 강사는 그 서명과 관련된 일화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어느 날 검찰에서 작가가 누군지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검찰에선 수사 중에 발견된 그림이 있는데 도통 누구의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봉'이란 사람한테 주는 것 같다며 의뢰한 그림을 보여줬는데, 그게 바로 도상봉 작가의 그림이었다.


도상봉  작가를 모르는 사람이 'To. SangBong'의 서명을 '상봉에게'로 해석한 것.


강사가 그 일화를 소개하자, 어디선가 '아우 무식해, 어째 도상봉을 몰라' 하는 말이 들렸다.

아마 미술계 종사자나 미술애호가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분명 누굴 들으라 한 것도 아닐 테고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이었을 테지만 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상봉 작가를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 여기는 그의 세계가 안타까웠다.


도상봉 작가는 분명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근대 서양화가이며, 나 역시 좋아하는 작가이지만 그를 모르는 게 무식은 아니다.

차라리 이미지 검색도 해보지 않고 감정 의뢰를 맡긴 검찰의 게으름을 탓했으면 그러려니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계가 타인의 세계와 같을 수 없다.

그에겐 도상봉 작가를 아는 일이 당연한 일이라면, 누구에게는 식물 이름이, 또 누군가에게는 자동차 부품을 아는 일이 당연한 일일 수 있기에 나에게 당연한 일이 남에게 당연하다고 섣불리 단언할 수 없다.



변호사로서 느끼는 바는 대다수의 분쟁은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같다는 전제 위에 사안을 올려놓음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다.

건물의 기반이 튼튼한 건 좋은 일이나 사고나 가치관의 기반이 너무 견고할 때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를 두지 못하고 밀어낼 때 큰 싸움이 되곤한다.


내가 생각하는 당연한 일이 당연한게 아닐 수 있다는 말랑말랑한 흔들림이, 다른 말로 관용이 있을 때 내가 품을 수 있는 세상도 커지는 게 아닐까.


#변호사일상 #관용 #도상봉 #브런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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