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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Dec 26. 2019

'혼공', 엄마가 결정적 순간을 만드는 방법

아이는 남편에게 맡기고 혼자 오케스트라 공연을 봤다

 조직행동론 전문가 칩 히스, 댄 히스 형제는 변화의 순간 그 자체라는 화두를 다룬 책 <순간의 힘>을 통해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순간 중심적 사고를 가질수록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힘주어 말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스스로가 자신의 등을 조금 더 떠밀 수 있다면,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아닌, 매달, 매해, 다채롭고 풍성한 이벤트가 가득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삶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매 순간으로 구성되고, 결정적 순간은 그중 가장 오래 살아남아 기억된다. (p16)
모든 문화권에는 각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생일, 결혼식, 졸업식, 명절과 장례의식, 정치적 전통까지 말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이 모든 기념일은 인위적으로 발명된 것이며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고 싶었던 이름 없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삶이라는 산문에 구두점이 필요한 곳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순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p32)




 그날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그 누구의 생일도, 제사도, 기념일, 명절도 아닌, 그저 보통의 11월 넷째 주 금요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11월 초부터 마지막 주 금요일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에게는 평범한 금요일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저녁 공연을 향해 바빠지는 나의 발걸음에 기분 좋은 설렘이 깃들었다 © 엄마 엘리



혼자 오케스트라 공연을 본 '혼공'의 날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그리고 저녁을 준비하면서 묻는 거다. 


 정말 혼자 갈 거야?



 남편은 저녁 8시에 시작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을, 예정대로 혼자 갈 거냐고 재차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내심, 그냥 표 취소했어, 라는 나의 대답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의 물음 자체가 의아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가야지!
미리 예매했는데 표를 날려야 되겠어?

 


 남편은 티켓값도 저렴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장당 3만 원이라는 내 말에 생각보다 비싼 거였군. 하면서 혼잣말을 한다. 평일 저녁 공연이다 보니 사전에 남편에게 양해를 구했다. 공연이 끝나면 아이가 잠드는 시간이 훌쩍 넘었기에 남편이 아이의 목욕과 밤잠을 맡아줘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공연장이 우리 집에서 아주 가깝다는 것이었다. 도보 15분. 공연 시간도 8시라 아이랑 함께 저녁도 같이 먹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 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거 보고 싶은데 예매해도 될까? 남편에게 공연 포스터를 찍어 보내서 물었다. 남편은 하고 싶은 것은 해야지, 하며 흔쾌히 답을 해줬다. 나는 곧장 예매를 했다. 무대 바로 앞 두 번째 줄, 정중앙, 한 자리. 그렇게 평범한 금요일을 결정적 순간으로 만드는 일은 나의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순식간에 이뤄졌다.



남편에게 아이를 맡긴 어느 금요일 저녁, 무대 코 앞에서 혼자 공연을 즐겼다 © 엄마 엘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을 보러 갔다



 사실, 3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내게 저녁시간은 그다지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다. 저녁은 하루 중 유일하게 가족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 목욕을 마치고 잠투정이 심한 아이를 재워야 하는 일과도 남아있다. 자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아이를 겨우 겨우 재우고 나면 나 또한 심신이 지쳐 일찍 잠들 수밖에 없는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평일 저녁 시간을 내야 갈 수 있는 저녁 공연은 내 입장에서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아이와 남편의 배려가 필요했고 가기 전에 가정 일과를 끝내 놔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회사에 돌아와 편히 쉬어야 하는 남편에게 '아이 밤잠 재우기'라는 어려운 미션을 떠넘기고 가는 것 같은 미안한 감정, 약간의 죄책감도 느껴야 했다. 가지 못 할 이유, 가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찾으려면 몇십 개도 넘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의 저녁 공연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결정은 엄마로서의 내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준 고마운 선택이 되었다. 


 이 얼마만의 공연장이었던가. 공연장을 들어선 순간 내 속에서 뭔가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공연장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았다. 그만큼 공연장의 공기는 생소했고 낯선 만큼 내겐 특별함으로 다가왔다. 120분간 이어지는 코리안 오케스트라 챔버 (with 김선욱)의 공연을 나는 내 온몸의 모든 감각들을 열고 흠뻑 빨아들였다. 그만큼 집중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을 정도로. 오케스트라 단원의 몸짓, 눈짓, 표정 하나, 숨소리, 턱선을 따라 흐르는 땀 한 방울까지 느끼며 공연에 젖어들었다.


 공연의 한가운데에 있자니, 불현듯, 21살 때 비엔나에서 본 오케스트라 공연이 생각났다. 몇 가닥 남지 않은 은발을 흩날리며 지휘를 했던 노장의 지휘자가 떠올랐다. 감귤빛 조명이 한가득 했던 훈훈하고 따뜻했던 공연장의 풍경이 되살아났다. 신기했다. 살면서 특별히 그리워했던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기억인데. 새카맣게 잊고 있던 죽은 시간들이었는데. 이날의 공연이 십여 년 전의 한 순간의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들인 것이다.


 




 이날의 공연은 내게 특별한 순간을 선물해줬다. 동시에 또 다른 꿈을 꾸게 해 줬다. 아이와 함께 클래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을 보러 오겠다는 새로운 꿈을.

 

 어린이 공연을 제외한 일반 공연은 대게 7세 이상 관람이 가능하다. 그날의 공연장에는 부모님과 함께 온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들이 상당히 많았다. 바로 내 옆자리에도 초등 저학년으로 보이는 딸과 엄마가 앉았다. 그녀들은 공연 내내 손을 꼭 잡은 채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공연을 즐겼다. 쉬는 시간에 엄마는 딸에게 공연의 소감을 물었고, 아이는 제 나름대로 관람평을 들려줬다. 모녀는 공연장이 꽤 익숙한 듯 보였다.


 유년시절 부모님과 공연장을 찾은 적이 없던 나에게는 새로운 광경이었다. 그들이 부러웠다. 아직 어린 우리 아이가 7살이 되면 꼭 아이와 함께 공연장을 찾으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딸과 함께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신년 음악회도 함께 하리라. 또 다른 꿈이 내 심장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엄마가 되니 마르지 않는 요술 주머니처럼 날마다 새로운 꿈들이 잔뜩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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