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설가에게 물었다
누가 소설을 쓰는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나는 유독 소설가에게 관심이 많다. 소설을 많이 읽지도 않으면서 소설가는 어떤 사람들 일지 늘 궁금했다. 단순 호기심일 수도 있고, 동경일 수도 있다. 왠지 그들에게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1달에 평균 4~5권의 책을 읽지만 그 안에 소설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따금씩 소설을 읽긴 한다. 그때마다 그 소설들은 나의 평온한 일상을 흐트려트린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 안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무수히 많은 감정들, 기억의 파편들과 마주해야 했다. 때로는 혼란스럽고, 때로는 창피하고, 때로는 불쾌한, 생각하기 싫은 그런 감정들까지 소설은 하나하나 다 들춰내서 내 앞에 꺼내놓고야 말았다. 평정심을 다시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소설이란 장르는 내게 친근하고 반가운 존재가 아니다. 오랜만에 만나서 속을 홱 뒤집어놓는 얄미운 동창생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흔쾌히 소설을 읽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또 무슨 이야기로 잘 살고 있다고 믿는 나를 흔들어 놓을까, 겁이 나서.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나에게 소설이란 세계는 복잡하고 난해하기만 하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도대체, 이런 소설을 누가, 어떻게 쓰는 걸까? 소설가의 세계관이 궁금해졌다. 소설이 어떻게 탄생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소설가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소설, 어떻게 쓰는 건가요?
우연히 같은 시기에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이상우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를 연달아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생, 1997년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신인상을 타며 등단했다. 이상우는 1959년 생, 1981년 소설 '에리직톤의 초상'이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나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10살이 많지만, 등단은 이상우가 16년 빨리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2016년에 나왔고, 이승우의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2006년에 첫 선을 보였다. 의미 없는 비교일 수 있지만 동시에 책을 읽은 내 입장에서 기록을 해보니, 묘하게 10년씩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각자 소설가의 삶을 걸어가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 100명이 있다면 100가지의 소설 쓰기가 있다고 했다. 정말이지 이 두 소설가의 작업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소설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 소설 쓰기를 갈망하는 이에 대한 조언은 마치 한 사람의 이야기인 듯 일맥상통한 면이 많았다. 그래서 서평도 함께 남기는 것이다. 그러는 편이 훗날 참고하기 좋을 것 같아서.
소설이라는 장르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프로레슬링 같은 것입니다. 로프는 틈새가 넓고 편리한 발판도 준비되었습니다. 링도 상당히 널찍합니다. 참여를 저지하고자 대기하는 경비원도 없고 심판도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습니다. '좋아요, 누구라도 올라오십시오'라는 기풍이 있습니다. 개방적이라고 할까, 손쉽다고 할까, 융통성이 있다고 할까, 한마디로 상당히 '대충대충'입니다. 하지만 링에 오르기는 쉬워도 거기서 오래 버티는 건 쉽지 않습니다. 소설 한 두 편을 써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중에서
정말입니까? 누구나 링 위에 올라가도 괜찮습니까? 첫 장부터 의문 투성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것은 자격증이 필요 없는 것이어서 그야말로 누구나 아무나 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결코 오랜 시간 소설을 쓰면서 소설가로 사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며, 그 삶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써보라고 하는 건지, 굳은 의지와 각오 없이는 링 위에 함부로 올라오지 말라는 얘긴지 헷갈렸다.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중략)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오리지낼리티에 대하여> 중에서
책을 다 읽고 덮을 때까지 계속 생각나는 구절이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보라는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무슨 뜻인가?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이란 것은 도대체 뭘까?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 페이지는 열 번도 넘게 읽은 것 같다. 책장을 멈추고 계속 생각을 거듭했던 기억이 난다.
무슨 일이든 다 그런 것 같다. 어떤 직장인이 될 것인가,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사업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등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무거워지고, 무거워지면 부담스럽고, 부담스러우면 피하고 싶어 지는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니까.
오히려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어떤 것'을 생각하다 보면 생각도 행동도 더 자유로워진다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감사했다. 내 가슴 한편에 꼬깃꼬깃 접어 가지고 다니는 부적같은 문장이 되었다.
비유하자면 발상은 소설의 씨앗이다. 씨앗이 미래의 나무를 품고 있는 것처럼 발상은 한 편의, 훌륭하거나 시원찮은 작품을 품고 있다. 소설 창작이 자연법칙에 충실하다고 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자연법칙을 위반하지는 않는다. 좋은 씨앗이 좋은 나무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듯 좋은 발상은 좋은 작품을 예감케 한다....(중략) 그러나 좋지 않은 발상이 형상화의 과정을 거쳐 좋은 소설로 태어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소설 쓰기는 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시작이 가장 중요하다.
<발상에서 썰이 태어난다> 중에서
작가는 소설이 종자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라 했다. 한 편의 소설이 물 흐르듯이 씌여질 수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훌륭한 소설을 잉태할만한 발상을 발견하는 것도 많은 품과 노력이 드는 일임을 깨달았다. 좋은 발상이 꼭 훌륭한 작품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런 발상이 좋은 작품으로 둔갑 할리는 만무하다니, 소설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누구나 작가다.
'작가의 말' 중에서
우리는 종종 내 인생은 한 편의 대하소설이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작가는 이야기는 곧 삶이고, 삶이 곧 이야기라고 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만들며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런 면에서 모두가 작가라는 것이다. 책 제목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가장 핵심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진짜 소설을 쓰는 것은 다른 이야기겠지만.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자전적 에세이보다 더 실질적인 '소설 쓰기'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한 편의 소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궁금한 독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만한 시원한 냉수 같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역시, 이 책에 소설적 테크닉을 담지는 않았다고 했다. 소설 쓰기는 기술적인 요인이라기보다, 소설에 임하는 자세, 의식, 태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신 때문이라고 했다.
소설가로서의 삶과 소설 쓰기에 비교적 친절한 두 책을 읽었지만 아직도 내게 소설이 친근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누구나 쓸 수 있다, 라고 하기엔 여전히 특별하고 비범하다. 우리 모두 소설적 삶을 살아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소설가의 삶을 감히 꿈꾸지는 못한다.
두 작가 모두 몇 십년 동안 소설을 쓰고 소설가로 살아오면서 이러한 세상의 편견과 오해의 시선을 충분히 느껴온 듯했다. 그런 그들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찬찬히 음미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두 책을 비슷한 시기에 읽은 것은 소설에 궁금증이 많은 나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