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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pr 30. 2019

커피 한 잔으로 이렇게 가치 있는 글을 읽을 수 있다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샀다

오랜만에 소설책을 샀다. 소설은 평온한 내 일상에 모래 한 줌을 투척해서 물을 흐리곤 하는 얄미운 존재 (무던한 편에 속하는 나를 어쩐지 예민하게 만들고 잊고 있던 감정까지 다 끄집어내는 요상한 재주가 있기에) 였는데, 요즘 왜 자꾸 소설에 눈길이 가는지 모르겠으나 문득 소설이 읽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안정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내 일상이 조금은 심심해졌나 보다, 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실로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샀다.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소설집을 읽고 서평을 남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계발서나 경제서처럼 의미 있고 자극이 될 만한 메시지를 추려내 정리할 수도 없고, 에세이처럼 일상적이지도 감상적이지도 않으며, 육아서나 인테리어 책처럼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은 후 이렇게 뭔가를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 책을 겨우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값으로 산 것이 미안해서이다. 특별 보급가 5,500원. 이래도 되나 싶은 (사장님이 미쳤어요), 물가상승률을 거슬러도 한참을 거스르는, 이런 게 바로 '득템'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



특별 보급가 5,500원, 안사면 손해




젊은 작가들을 널리 알리자는 상의 취지에 따라 출간 1년 동안은 보급가로 판매한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 한 권을 사서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는 바람이 이 책을 다 읽고 생겼다. 한 달에 보통 4,5권의 책을 읽지만 소설은 1년에 손에 꼽을 정도만 읽는 이 미천한 독자인 내가 봐도 이런 책은 '안 읽으면 손해'라고 느끼는 것이다.


소설에 대한 (특히 한국소설) 내 무지를 증명하듯이 올해 젊은작가상을 받은 7인의 이름은 모두 낯설었다. 전부터 관심이 있어 눈여겨본 어떤 작가가 올해 젊은작가상에 이름을 올렸을 때 느꼈을 희열은 나와 무관하지만, 그래도 한 때는(시간이 무한정 주어졌던 20대 때) 책이라곤 닥치는 대로 소설만 읽었던 충실한 독자 경험이 (다행히) 유산같이 내 안에 남아있어서 이 책에서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내 취향의 소설을 '써주시는' 소설가 두 명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발견이라는 단어가 맞는 건가, 싶지만.


'공의 기원'을 쓴 김희선과 '시간의 궤적'을 쓴 백수린. 굳이 구분을 하자면 나는 여성 작가의 작품에 더 흥미를 느낀다. 이것은 국내든 해외든 국적 불문, 단편적으로나마 소설을 읽으며 체득한 나의 소설적 취향이다.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을 때에 그것을 인식하고 읽지는 않았지만, 한 권을 소화해내고 나니 두 작가의 작품과 이름이 가슴에 남았다. 특히, '공의 기원'은 읽는 내내 (실제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제1,2,3회 세 차례나 연거푸 젊은작가 수상자였다가 이번 10회 젊은작가상에 심사위원으로 합류한 김성중 작가는 이렇게 심사평을 했다.


공 하나로 이만큼 사실적인 뻥을 늘어놓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축구공이 작품 안에서 문자 그대로 굴러다니는데 장소만 해도 제물포-런던-펀자브를 넘나들고 그에 따라 제국주의, 아동 노동착취, 마르크시즘, '멋진 신세계'로 대표되는 미래 담론까지 건드린다. 문장으로 드리블을 한다고 할까.


마지막 문장, "문장으로 드리블을 한다고 할까"는 기가 막히게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김희선의 단편 소설 '공의 기원'의 한줄평이 있다면 이렇게 씌였을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공의 기원' 같은 경우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축구공 하나로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는 그의 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딴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흡입력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의 장편 소설 <무한의 책>과 <골든 에이지>도 꼭 읽어봐야겠다, 고 다짐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소설가 백수린은 책을 읽기 전부터 호감을 느꼈다. 사은품으로 함께 받은 '2019 젊은작가상 신문'에 나온 작가들의 책 소개를 읽으며 그녀가 궁금해진 것이다. 바로 이 한 줄 때문이었는데,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의 사람들을 섬세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는 백수린'이라는 한 줄에 그만 대상작을 건너띄고 '시간의 궤적'부터 읽어버렸다. '소통하지 못하는 현실의 사람' 중 한 명이어서였을까, 분명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삶이지만 왠지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 쓸쓸함이 느껴져 읽는 내내 헛헛했다. 황종연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심사평을 했다. (내가 한국소설 애독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한번 명백해졌다)


한국 단편소설 애독자라면 본문에 저자 이름이 없더라도 '시간의 궤적'이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프랑스로 건너간 한국인 여자들의 열정과 회한, 동경과 비애를 다루면서 이만큼 인상적인 장면과 잔향 많은 일화를 남길 수 있는 작가는 백수린 외에 달리 없다.


오랜만에 책을 구매한 것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다), 책을 구매하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다 읽은 책들을 쌓아둘 공간이 없어서, 좁아지는 공간에 대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미니멀리스트로는 살지 못하는 모순된 자신을 설득할 수 없어서, 라고 밝혀두고 싶다.


결론은 커피 한 잔과 백번 맞바꿔도 아깝지 않을 시간과 글이었다. 오히려 이정도의 값만 지불 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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