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내게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실로 오랜만에 친구한테 카톡이 왔다. 어렸을 땐 미주알고주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느라 매일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는데, 아이를 낳고는 서로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카톡 조차 자주 하지 못한다.
날씨가 참 좋다
그러게, 너 어디니?
버스 타고 학교 가고 있지, 내가 날씨가 좋다고 했는데 어떻게 만나자는 소리가 없니?
날씨가 좋은 거랑 만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ㅋㅋㅋㅋ
지금 너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잖아 ㅋㅋㅋ
이런 실없는 대화를 나누던 우리였다. 날씨가 좋다고 만나서 술 마시고, 벚꽃이 진다고 아쉽다며 함께 커피 마시고, 가을이 와서 싱숭생숭하다며 같이 밥을 먹던 우리였는데.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고 만나고를 반복했었는데, 그렇게 매일 만나도 할 말이 끝이 없었는데, 그러던 우리가 어느덧 삼십 대 후반, 아이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현재의 안정, 기쁨, 행복과는 무관하게) 지나간 10대, 20대 시절이 문득 그리워질 때가 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제주도 가서 살고 싶다
누가 제주도 갔어?
아니, 연예인들... 많이 내려가서 살잖아, 그런 거 보니까 나도 가서 살고 싶기도 하고 그러네
그녀는 제주도에 내려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여행이 아니라 살고 싶다고. 말을 뱉은 그 순간은 진심이었으리라. 그녀는 머릿속으로 꿈만 꾸는 것에 지친다고 했다. 현실은 늘 제자리걸음이고, 상상하는 꿈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뉘앙스로 얘기한 것으로 기억한다) 가슴속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특별히 삶을 흔들 만큼 큰 문제나 사건도 없는 걸 알지만) 그저 몇 마디로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 우리는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예전만큼 미주알고주알 공유하지 못한다. 못 하는 걸 수도 있고 안 하는 걸 수도 있고. 우리는 서로의 과거보다 현재를 더 잘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의 우리는 서로가 알고 있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있을 텐데, 여전히 서로를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쯤으로 대하고 있다. 어쩌면 서로의 현재를 직면할 자신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제주도에서 살면 행복해질까?
만약, 정말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만족할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녀가 쏘아 올린 제주도 불씨는 나에게 전이되었다. 제주도, 아니 머물고 싶은 그 어딘가로 가게 된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녀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경험을 같이 해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젊은 날, 치앙마이에 가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 그녀는 세 달, 나는 여덟 달을. 처음 한 달은 여행자의 신분으로 낯선 곳을 탐색하고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와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설레었다. 그리고 정확히 딱 세 달이 넘어가자 그곳은 더 이상 새로운 곳이 아니었다. 또 다른 삶의 터전이자 일상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숙소 근처 식당에 가서 아침을 먹고, 슬슬 걸어서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셨으며, 태국어 수업을 들으러 어학당에 갔다. 수업이 끝난 후 다시 카페에 가서 독서를 하거나, 수영을 하고 빨래를 맡겼으며, 저녁에는 숙소 근처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시간에는 숙소에 들어와 그날 찍은 사진을 보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일기를 썼다. 하루하루 똑같이 반복하는 루틴이 생기자 그곳은 우리에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일상이 되고 나니 자연스레 또 다른 고민이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에서 사귄 친구들과는 늘 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한국 라면을, 한국 술집을, 한국의 추운 겨울을 조금씩 조금씩 그리워했고 그 대화를 나누는 빈도도 잦아졌다. 숙소 근처 세븐일레븐에서 파는 한국 사발면을 발견한 후로는 거의 매일 밤 사다 먹었고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굳이 치앙마이까지 가서.
한국에 돌아온 뒤 가끔씩 치앙마이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다시 그곳에 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 자신이 없다. 산다는 것은 여행과는 다른 삶의 무게를 지닌다는 것을,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공허함이 함께한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느껴봤기 때문이리라. 그 이후, 다른 어떤 곳에서의 삶, 다른 이들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장밋빛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경계하게 됐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도 있지 않은가. 매일 매 순간을 살아가는 내가 내 삶을 가장 잘 안다. 가까이 정도가 아니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정도로 세밀하게 보고 느끼고 있으니 내 현실은 늘 비극 같다는 생각이 든다. 뜻대로 되는 것도 없고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이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불과 한 달 전, 1년 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상하게도 기분 좋은 일, 재밌었던 일,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한발 떨어져 보면 비극 같았던 내 현실도 희극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희극을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만날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면 가까이서도 우리 현실이 더 이상 비극의 모습만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를, 누군가를 무작정 선망하지도 않게 되지 않을까.
진정한 파랑새는 머나먼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