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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Mar 30. 2019

그 시절 치앙마이, 내 청춘

8개월 간의 달콤 쌉싸름했던 시간

한 달 살기가 유행하기도 한참 전인 11년 전, 치앙마이에서 8개월간 살았던 적이 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치앙마이에서 어떻게 8개월간이나 눌러앉았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실마리를 찾자면 대학생 때 떠난 태국 자유여행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친구와 한 달간 태국 여행을 다녀왔고, 그렇게 '태국 앓이'가 시작됐다. 태국을 가기 전의 나와 갔다 온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머릿속에는 어떻게든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 매캐한 공기, 뜨거운 햇빛, 사람들의 여유로운 미소가 너무나 그리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학을 해버린 후였다. 인생 최초의 휴학. 이렇게 추진력이 있는 사람이었던가, 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방콕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이번엔 1년짜리 오픈티켓으로.




2008년 겨울, 꼬창의 해변가. 여유롭고 따사로웠던 곳이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곳이야!



대학교 3학년, 취업준비를 해야 할 처지였지만 '현실도피'는 아니었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냥 태국이 앞으로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무책임하지만 그때는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우리나라 드라마, 영화, 음악 등 문화 콘텐츠를 태국 방송국에 수출하는 일종의 콘텐츠 무역회사가 있었는데, 대표가 한국분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착해서 한 번은 거기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류 열풍이 거세지도 않았지만, 한국과 태국을 연결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장기간 눌러살려면 현지에서 '직장'을 구해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의무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찾아가지는 않았다. 일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도 아니었고, 앞날이 창창할 것이라 믿었던 젊은 날에는 '무수한 시간'을 마냥 누리고 보자는 심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세상 밖으로 나갔지만,
생각은 갇혔던 시절



젊다고 생각이 깨어있지는 않은가보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말이다. 오래 머물기 위해 돈을 벌 필요성을 느껴서 생각한다는 것이 '사업'이 아니라 '취직'이었으니까. 지내는 동안 사업 기회를 엿볼 수도 있었고, 창작자의 삶을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로 '어딘가 고용된 노동자'라는 울타리를 만들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키워 현실적인 제약이 더 많아진 지금이 훨씬 자유롭게 생각하고 꿈을 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스스로 한계를 긋고 세상을 보니 사고의 폭도, 시야도 좁았다. 코끼리를 훈련시킬 때, 아기 코끼리의 한 발에 밧줄을 묶고 단단한 나무에 꽉 매달아 키운다고 한다. 코끼리는 도망치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지만 이내 도망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이후에 줄을 끊어줘도 그 코끼리는 커서도 도망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시도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스스로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가 바로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더 많은 기회를 보지 못한 청년 코끼리였다.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빠이



달콤 쌉싸름했던 내 청춘



11년이 지나 이제는 엄마가 된 아줌마가 11년 전의 20대 학생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참 많지만 그런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하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귀한 '시간'을 손안에 쥔 모래처럼 흘려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지에서 현지인 상대로 한국어 과외도 하고, 어학당에 다니면서 태국어도 배우고, 어학당에서 만난 벨기에, 영국, 미국, 호주 등 다양한 출신의 또래들과 어울려다니기도 했으니 그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친구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었다. 다 알아들을 수 없어도 항상 어울려 다녔기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그래서?"라고 질문하게 됐으니 귀가 뚫린다는 것도 체험했다. 아쉽게도 몇 개월 만에 입은 터지지 않았고, 그렇게 뚫린 귀도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빛의 속도로 막혔지만 그래도 그때 배운 태국어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12년을 공부한 영어보다도.



그야말로 대단했던 치앙마이 쏭크란 축제


올 겨울, 다시, 치앙마이



태국에 아예 눌러살까 봐 걱정됐던 그때 당시 남자 친구가 혈혈단신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그 남자 친구는 현재의 남편이 되었다. 우리에게 태국, 치앙마이는 서로의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8개월간의 경험이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다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장과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올 겨울, 다시 치앙마이로 간다. 치앙마이 티켓을 끊으니 불현듯 가슴속에 20대 청춘이 머물렀던 치앙마이가 밀려들어왔다. 기억 속 너무나 생생한 그 시절 젊은 날의 나와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메인사진 : 치앙마이 펀포레스트 fun forest 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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