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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pr 15. 2019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인 심리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마주하다

2018 월드컵, 우리나라가 세계 최강인 독일을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축구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다. 특히, 영국은 마치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회복하기라도 하듯, 주요 매체 1면을 할애하며 대서특필로 다루었다. 한국이 독일을 이겼다, 가 아니라, (잘난척 하던) 독일이 떨어졌다, 쌤통이다 라는 뉘앙스로.



2018 월드컵 독일 탈락 후 BBC 홈페이지 메인



우리는 남의 불행에서 행복을 느끼곤 한다. 잘 나가는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이 한순간에 몰락했을 때, 명문대 나온 엄마 친구 자식이 백수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을 때, 헤어진 연인이 불행하게 지낼 때, 대기업 다니는 친구가 권고사직을 당했을 때 등등 나보다 잘 나갔던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는 소식을 접하면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경우, 다들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심리를 일컫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바로 '샤덴 프로이데'다.


샤덴 프로이데 (Schadenfreude)
독일어로 손해를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이라는 뜻의 ‘프로이데(freude)’를 합성한 이 단어로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을 말한다. [위키 백과]


그런데 이런 샤덴 프로이데가 뇌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한다. 일본 교토 대학교의 다카하시 히데히코 교수팀은 샤덴 프로이데를 느낄 때 뇌에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20대 남녀에게 시나리오를 주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기게 했다. 시나리오에는 주인공 외 3명의 동창생이 등장하는데, 이 동창생들이 성공할 때 주인공들은 강한 질투를 느낀 반면, 동창생들이 불행에 빠질 땐 주인공의 쾌감이 높아졌다고 한다.


이때 뇌에서는 질투를 강하게 느낄수록 불안과 고통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배측전방대상피질' 이 반응하였다고 한다. 반면, 잘 나가는 친구의 불행을 확인했을 때에는 뇌에서는 기쁨, 중독, 보상과 관련된 '복측선조체'의 활동이 활발해졌다고 한다. 우리의 뇌가 실제로 타인의 불행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뇌에서 이렇게 반응한다. 다만, 시기심, 질투심, 열등감, 자격지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샤덴 프로이데를 더 자주, 강렬하게 느낀다고 한다.



우리는 매일 수시로 누군가의 소식을 접하고 전한다 (출처 : unsplash)




소식 들었어?



우리 주위에는 남의 공을 깎아내리거나, 남이 잘 안 풀릴 때 여기저기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안 좋은 소식은 누구보다 발 빠르게 듣고, 누가 어쨌다더라,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랬다더라, 하면서 말을 전하기 바쁘다. 대기업 다닌다고 기고만장하더니 승진시험에서 미끄러졌단다, 시댁, 친정 다 빵빵해서 걱정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자식이 안 생긴다더라, 주식투자 성공해서 무리하게 투자했는데 지금 엄청 손해보고 있다더라 등등. 희안하게 안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 더 잘 들린다.


고백하건대, 나는 학창 시절, 어쩌면 30대 초반까지도 샤덴 프로이데를 엄청 잘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보다 별로 나은 것도 없어 보이는 무수히 많은 '쟤'는 항상 나보다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고 취업도 잘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를 가고 자격증을 따고 취업을 해도 내 삶은 항상 '쟤네들'보다 뒤처져 있었다. 그래서 늘 그들을 깎아내렸다. 그들의 안 좋은 소식에 안테나를 세웠다. 그래야 내 마음이 잠시라도 편해졌으니까.


"아, 걔 의사 됐대? 의사도 옛날 같지 않대, 편입 대학원이 생겨서 의사가 넘친다더라, 폐업하는 병원들도 얼마나 많은지, 말은 안 해도 걔도 고생 꽤나 하고 있을걸"

"강남으로 이사 갔다고? 전세래지? 강남 차 막히고 복잡하고 어휴 살기는 그리 좋지 않대"

"걔 무슨 일 생겼다니? 걱정 있는 얼굴이던데, 얼굴도 팍 상했더라”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자꾸만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찾았다. 남을 걱정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타인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저들도 나보다 나을 게 없다, 고 안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발전시키거나 자기 계발에 에너지를 쏟는 대신, 남을 깎아내리고 남의 불행을 찾는 편이 더 손쉬우니까.


남의 성공에, 남의 실패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더하고 입에 오르고 내리는 것은 흥미롭게 느껴지지만, 나의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잘 안 풀리는 이유를 부모 탓, 나라 탓, 사회 탓, 가족 탓으로 돌리는 것은 참 쉽지만,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우연한 계기에 나를 돌아보게 됐다 (출처 : unsplash)



우연히 한 친구의 샤덴 프로이데의 언행에서 예전의 나의 모습을 보았다. 비로소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마주 보게 되었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던 나를 인정하고 나의 열등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고서는 진정한 나로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더 이상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 살기 싫었으니까.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들여다보니 유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기억 속 어린 시절의 열등감과 마주하며 그때의 감정을 인정하고 용서했다. 외롭고 힘들었던 사춘기 시절의 나도 만났다. 매일 야근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미련했던 사회초년생 시절의 나도 만났다. 뭔가 더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주저앉기를 반복했던 서른무렵의 나도 만났다. 결혼하고 엄마가 된 이후의 나도 만났다.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그 자체로 나의 일부였다.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는데 3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평생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것을 안다.


더 이상 남의 불행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더 나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불행에서 행복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나의 발전과 행복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불행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간다면, 내 안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에게 말을 건네보자.


'신경 끄고 너나 잘하자' 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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