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난사되었던 길고 긴 하루였다.
무거운 의무감이 숙제 같다는 생각으로 고정되었다. 좌절과 분노로 반복된 날들이었다.
반복된 실패에 의무를 게을리하게 되었고 급기야 시간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분명 불필요한 감정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죄책감은 자주 나를 괴롭혔고 결국 모든 마음의 짐을 외면하던 때였다.
그럼에도 생리가 하루 이틀 늦어지면 기대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어김없이 실망을 하고 속상해하는 것이 이제쯤이면 덤덤해질 만도 했지만 좀처럼 실망에는 면역이 되질 않았던 때였다.
12월이 오면 시험관을 해보기로 서로 마음을 다잡아보았던 때이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내가 임신을 결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때이기도 했다.
생리가 늦어지던 그날도 다른 날처럼 헛된 기대라고 생각이 들었던 날이었다. 하루 이틀은 늦어질 수 있으니까 라며 커지려는 기대를 애써 눌러보던 날이었다. 생리가 예정일에서 삼일이 멀어지자 혹시나 싶은 기대감에 임테기를 샀다. 당장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첫 소변이 가장 정확하다고 하니까 다음 날 눈을 뜨면 경건한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리 예정일에서 넷째 날이 되는 새벽 네시 반. 잠을 설치고 깜깜한 새벽에 눈을 떴던 그날 새벽이 결국 잊지 못하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었다.
그렇게 화장실에 앉아서 한참을 테스트기로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기뻤다기보다 감격스러웠다기보다 다행이라는 마음이 첫 번째로 찾아든 감정이었다. 행운이 주어졌다면 이 순간인가 싶기도 했고 언제나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결과를 손에 쥐어주지 않았던 이름 모를 신에게 이번에도 너는 나에게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우쳐 주고 싶었던 건지 묻고 싶기도 했다.
성취하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기쁠 줄 알았는데 기쁨은 옅었고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난사되었다.
느지막이 잤을 남편을 황급히 깨웠다. 나 임신인가 봐, 남편은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본인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하였다. 어!!????!!!??
동이 트려면 아직도 한참이 남았을 캄캄한 새벽의 긴 허리 사이에서 나와 남편은 임테기에 그어진 두 줄 위에 서 있었다.
남편은 나보다 늘 침착한 성품이라 이 사실에 기쁘면서도 들뜨지 않으려고 본인을 다잡았다고 한다.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에 나도 남편도 지금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실망하지 않기 위해 기대로 날아오르려는 마음을 눌러 잡아 두었다.
같은 날, 개님을 산책시키며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겨울바람에 지나가는 말처럼 모친에게 나 임신한 거 같아,라고 했다. 이 사실을 남편 다음으로 알리고 싶었던 사람, 내 나이쯤엔 애 둘을 낳고 무심한 남편과 생활고에서 고군분투했을, 나의 난임에 누구보다도 속상해하며 애써 날 위로해줬던 모친에게 흘러가는 말처럼 진지하지 않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때 엄마의 감정은 뭐였을까, 엄마도 나처럼 다행이라도 생각했을까, 엄마도 남편처럼 이 사실이 기쁘면서도 들뜨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이 떠올랐을까
이름을 정하기조차 어려운 감정이 다양하게 오고 갔던 아주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