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여행 첫날
지난겨울에 이어 엄마와 단둘이 찾은 두 번째 제주도. 이번에는 무계획 여행이다. 첫날 오후 1시쯤 겨울에 만들었던 라탄 가방을 수리할 계획만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많이 걷자고 했다.
아침 8시 제주 공항에 도착해 근처에서 밥을 먹었다. 1시간 거리에 있는 아르떼 뮤지엄으로 향했다. 마침 10시 오픈이라 시간이 딱 맞아 떨어졌다. 30분 만에 갈 수 있었지만, 일부러 해안 도로를 따라 1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다행히 엄마는 다양한 미디어 아트를 보며 즐거워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있는 김창열 미술관이 있었다. 50여 년간 물방울만 그린 작가를 보러 갔다. 성인이 되어 엄마와 처음 간 미술관이었는데, 다양한 형태의 물방울을 보며 엄마는 무척 신기해했다.
미술관에서 나왔는데 아직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있었다. 근처에 있는 저지 오름으로 갔다. 주차장 입구부터 오름 전망대까지 340미터 밖에 되지 않아 우리에게는 안성맞춤인 코스였다. 산책하듯 슬슬 걸어 전망대에 올라 제주도 전역을 한눈에 보고는 내려왔다.
10분 거리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가방은 복구가 불가능했다. 엄마의 눈빛이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은 가방을 다시 만들 수 있도록 본인이 만든 새 라탄 바구니를 주셨다.
여행 첫날 오후 2시 30분. 모든 일정을 마쳤다. 우리는 1시간 30분 거리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여행 둘째 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밀린 일을 처리했다. 사무실에 전달해야 하는 자료, 뉴스레터 만들기, 다음 주 발표 자료 준비. 하다 보니 10시가 다 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났던 엄마는 기다리다가 다시 잠들었다. 10시 10분 온라인으로 요가 수업을 듣고 11시 30분이 다 되어 숙소를 나섰다.
오늘의 유일한 일정인 사려니숲에 갔다. 삼나무가 빼곡하게 차 있는 자연 그대로의 공간. 잘 깔아 놓은 길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사려니 숲 중간의 벤치에 앉아 엄마와 10분 명상을 했다.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에는 평상에 누워 사려니 숲 속 하늘을 본다.
잠깐 눕는다는 게 깜빡 잠이 들었다. 두 시간 반 가량 사려니숲길에서 산림욕을 하니 배가 고파졌다.
제주도에 오면 꼭 먹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문어라면’이다. 검색하니 1시간 거리에 ‘살아 있는 문어라면’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식당을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굼부리’ 표지판이 보였다. 차를 돌려 산굼부리를 먼저 보러 갔다. 굼부리는 화산체의 분화구를 이르는 제주어다. 약간의 경사가 있었지만, 평지처럼 길게 이어진 길이 산책하기 딱 좋았다. 갈대숲과 움푹 파인 분화구 등 저절로 만들어진 자연이 아름다웠다.
산굼부리를 보고 본래의 목적지인 문어라면을 먹으러 갔다. 해안가에 있는 식당이었다. 라면을 시켜 놓고 엄마와 잠시 바다 구경을 갔다. 돌아오니 문어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라면이 있었다.
엄마와 나는 라면은 저리 치워 두고, 문어와 푸짐하게 들어가 있는 해물을 다 먹어 치웠다.
둘째 날 여행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맥주 두 캔을 둘이 나눠 마시고 잠들었다.
#여행 셋째 날
두 번째 숙소 근처의 서귀포 향토 오일 시장에 갔다. 다음 날 추석 차례상에 올릴 과일을 몇 가지 샀다. 하우스에서 자란 귤, 샤인 머스캣, 그리고 제주에서 자란 애플 망고.
시장을 한 바퀴 돌며 구경을 했다. 2시간쯤 돌았을까. 배가 고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에 들고 가는 호떡이 맛있어 보여 호떡 하나를 사서 반씩 나눠 먹었다. 그리고 겨울에도 들렀던 식당에 가서 순대 국밥 한 그릇을 시켜 엄마와 함께 먹었다. 내 생에 이렇게 맛있는 순대 국밥은 처음이었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나와 숙소 주소를 검색했다. 가는 길에 ‘치유의 숲’이 보였다. 숲 근처에 주차를 하고 ‘치유의 숲’ 옆에 있는 ‘추억의 숲길’로 들어섰다. 사려니 숲길처럼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자연 그대로였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잘 찾아왔다’ 싶었다.
20~30분 걷다가 나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정표에 보이는 ‘편백 쉼터’는 꼭 가보고 싶었다. 결국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편백나무 군락지에 도착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사이에 있으니 숨만 쉬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빈 평상에 누웠다. 잠시 눈을 감았는데, 금세 잠이 들었다.
20~30분 가량 잠들었을까. 눈을 뜨니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다. 늦기 전에 내려가야겠다 싶어서 엄마와 서둘러 입구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세 개의 갈래길에서 날이 어두워져 편백 쉼터까지 가지 못 하고 되돌아가는 일행을 만났다. 덕분에 중간에 길을 잃지 않고 입구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오후 2시쯤 시작한 산책은 5시에 끝이 났다.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씻었다. 그리고 다시 맥주 한 캔과 서귀포 오일장에서 사 온 과일, 옥돔을 안주 삼아 저녁을 먹었다.
#여행 넷째 날
추석이다. 제주에서 맞이한 추석. 엄마는 새벽부터 밥을 하고, 차례상 차릴 준비를 했다. 나는 7시쯤 눈을 떴다. 엄마가 서울에서 챙겨 온 북어포, 오징어, 사과를 하나씩 차례상에 놓았다.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인 ‘갈치-서귀포 오일장에서 사온’와 애플망고, 샤인 머스캣 그리고 귤을 올렸다. 아빠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아이스크림도 잊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열어 놓고 차례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후 엄마와 아침을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났다. 늦게 일어났는데 ‘내일 시간 괜찮으면 한라산에 가보자’고 했던 엄마 말이 생각났다. 찾아보니, 한라산은 입산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2시까지 가야 입산할 수 있었다. 그때 시간 오후 1시. 얼른 준비를 하고 한라산으로 향했다.
어리목을 목적지로 가다가 영실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여서 차를 돌렸다. 영실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해 화장실도 들렀다. 오후 1시 43분. 아슬아슬하게 영실코스로 입산했다.
오후 4시가 하산 시간이라고 되어 있어서 30분 정도 올라가다 내려올 생각이었다. 걷다 보니 엄마는 끝까지 가겠다고 한다. 결국 계속 걸어 대피실이 있는 윗세오름까지 갔다. 윗세오름이 새겨진 바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하산 시간을 훌쩍 넘겨 오후 5시 30분쯤 주차장에 도착했다. 내려오자마자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숙소 근처의 고깃집으로 향했다. 우리는 말도 없이 고기로 배를 가득 채우고 숙소로 돌아왔다.
#제주에서 돌아오며 그리고 에피소드
여행 중간에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신치야 안녕~ 엄마랑 모든 것 다 잊고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 보내고 와~~ 엄마랑 다투지 말고”
예전에 엄마와 둘이 시간을 보낼 때면 시도 때도 없이 가슴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와 그것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1시간을 같이 있기도 어려운 사이였다. 엄마는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걸 듣는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화’가 났다.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을 걸거나, 엄마의 말에 대꾸를 하지만 대화가 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몇 마디만 이어지면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다행히 욱하는 마음도, 화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엄마가 계속 다른 사람 이야기를 반복해도, 운전 중에 내게 하는 말의 80%가 ‘속도 낮추라’는 것이어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지난 1월에 엄마와 둘이 제주도 여행을 왔을 때도 짝꿍이 내게 ‘엄마와 싸우지 말고 잘 놀다 오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4박 5일의 여행 일정 중 단 한번 싸웠다. 그리고 8개월 만에 다시 찾은 엄마와의 제주. 태풍이 지난 뒤 고요한 제주 바다만큼 이번 여행은 크고 작은 파도의 일렁임 없이 잔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