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와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냥 매일 아침을 눈을 뜨면 거실 1인용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펼친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렇게 시작한다. 쓰다 보면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들, 생각, 무의식에 숨겨진 것들까지 나온다.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했던 건 대학생 때였다. 학생회를 하며 주기마다 어떤 주제에 대해 몇 명이 글을 썼고 그 글들을 엮어 소식지를 만들었다. 그때 썼던 글 중 기억에 남는 하나는 어린 시절 집에서 겪었던 가정폭력과 관련한 에피소드였다.
어릴 때였다. 5살, 6살쯤이었을까? 잠결에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떠 버렸다. 난생처음으로 아빠가 엄마를 향해 쏟아붓고 있는 온갖 상스러운 욕설들이 내 귀속에 들어왔다. 그 상황이 꿈이길 바라며 다시 이불속에 파묻혀 잠을 청했지만, 필터 없이 들려오는 소리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염없이 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10여 년을 아빠의 엄마를 향한 가정폭력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여름날, 그 일이 있기 전 까지는 말이다.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시험을 마치고 일찍 집에 왔다. 모처럼 낮에 온 가족이 집에 있었다. 평화롭던 오후를 깨뜨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나는 그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빠의 폭언에 온몸이 부르르르 떨렸다. 나는 부엌에 있던 칼을 한 손에 들고 아빠를 향해 달려갔다.
"그만해. 아빠 죽여버릴 거야!"
10여 년간 차곡차곡 쌓아왔던 분노가 화산폭발하듯 터지는 순간이었다. 아빠를 향해 달려갔으나 아빠 앞에서 멈췄고, 그때 엄마는 잽싸게 내 손에 있던 칼을 가져가며 말했다.
"우리 아가 착하지. 그 칼 이리 줘"
어쩌면 모든 가족들의 기억 속에 박재되어 있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그날의 사건. 몇 년이 지나 나는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글로 썼다. 그리고 곧 방학이 되어 내가 쓴 글이 담긴 책을 집으로 가지고 갔다. 엄마에게 먼저 책을 주며 말했다.
"내가 쓴 글도 있어."
내 글을 읽은 엄마는 아빠에게 건넸다.
"당신 얘기네, 읽어봐"
내 글을 읽은 아빠도, 엄마도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이라도 한마디 해 주길 바랐지만, 끝내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관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꾹꾹 눌러 담아왔던 감정은 칼을 들고 아빠에게 가는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처음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그 사건을 글로 쓰면서 다시 한번 그 때의 일은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으며 관련한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글쓰기의 힘을 느꼈다.
"글쓰기는 단순한 의사소통이 아니라, 자기를 변화시키는 기술이었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글쓰기를 '자기 돌봄'의 한 방법으로 실천했다. 일기나 편지 혹은 기록을 통해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윤리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또한 심리학에서는 글쓰기를 자기 치유의 도구로 활용한다. 돌아보면 아빠를 향해 돌진했던 것은 분노라는 감정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표출된 사건이었고, 글쓰기는 긍정적인 방법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자신의 감정을 잘 캐치하지 않고, 그저 꾹꾹 눌러 담기 바빴던 내게 글쓰기란 '나 스스로를 관찰하고 돌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때 매주 읽은 책에서 만난 문장들은 내 감정, 내가 경험한 것들에서 느낀 것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또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해 주기도 했다.
최근에 제주로 오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건강의 관계를 연구하는 <표현적 글쓰기>의 저자 제임스 페니 베이커는 외상이나 충격적인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것과 건강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침을 내렸다.
"앞으로 4일 동안 당신이 평생 가장 심하게 체험했던 외상을 주제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글로 쓰기 바랍니다. 글을 쓰면서 당신의 아주 깊은 감정과 생각들을 진정으로 풀어놓고 탐색해 보기 바랍니다. 주제를 부모, 애인, 친구, 친척과의 관계, 과거, 현재, 미래 또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지금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것으로 국한시켜도 좋습니다. 또는 작문 기간 내내 똑같은 주제나 경험에 관해서 써도 좋고, 매일 다른 외상에 관해서 써도 좋습니다. 당신은 하루 최소 15분간 써야 하며, 며칠이 되든 필요한 만큼 연속해서 써야 합니다."
마치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듯이 이 지침을 따라 글을 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