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캬닥이 Mar 15. 2020

끝나버린 채식과 시작하는 주식

현대인이 찾는 깨달음의 길

한때 채식을 했다. 10년 전 즈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신념에 충실했고 사회적으로는 광우병 파동으로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가짜 뉴스는 가득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을 읽고, 광우병에 대한 소문은 진위를 모를지언정 내가 먹는 소의 고통은 진실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렇게 시작한 채식은 3년 넘게 지속하다 대학교 1학년 때 끝났다.


대학에 입학하며 고른 생명공학 전공의 정체는 축산이었다. 취업 설명회가 끝나면 정육 식당에 함께 가서 돼지고기를 배 터지게 먹는 전공이었다. 다른 과에서 나무젓가락에 꽂은 파인애플을 팔 때, 우리 과에서는 같은 가격에 삼겹살을 팔았다. 동문이 세운 축산 회사에서 고기를 후원한 덕분이었다. 동료 압력에 못 이겨 고기를 다시 먹었다고 하면 솔직하지 못한 대답이다. 어떤 과인지는 입학 전부터 진즉 알았으니까. 나는 축산과에 진학해 친구들에게 소고기를 덜 익혀 먹는 법을 배웠고, 교수에게는 돼지고기도 바싹 익힐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이제 강의실에서 배운 축산 지식은 잊어버렸지만, 함께 먹은 고기의 맛은 생생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보낸 시간이 대학에서 보낸 시간만큼 길어졌다. 나는 채식주의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반려와 채식 책을 읽고, 일주일 한 번 페스코(육류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 계란과 생선까지는 먹는다) 데이를 시도해본 적도 있지만 흐지부지되었다. 10년 간 먹은 고기 맛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년 만에 사람이 이렇게 변했다. 스무 살의 내가 서른 살의 나를 보면 혀를 찰 것이다. 서른 살의 나는 스무 살이었다면 과학 책을 읽었을 짬에 주식 투자 책을 읽는다. 신념은 버리고 작은 이익에 열을 내는 모습이 얼마나 꼴불견일까 싶다. 


채식주의는 금연과 비슷하다. 담배를 줄이는 것만으로는 금연을 성공할 수 없다. 오늘 하루 담배를 한 개비 줄여봐야 ‘오늘 하루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경우에 비교당해 보람되지 않다. 마르타 자카라트타는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한 사람이 고기를 끊는 것보다 수백만 명이 한 달에 한 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 평생 한 달에 한 번 ‘고기 안 먹는 날’을 지키는 일은 한 사람이 평생 채식하는 삶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사람은 길고 애매한 선행을 지속하는 동물이 못 된다. 한 명이든 수백만 명이든 사람의 의지란 거기서 거기다.


고기를 줄이는 일은 주식으로 돈을 버는 삶과 비슷하다. 둘 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사람의 본성을 거슬러야 한다. 몇 번 주식을 사고 팔면서 주식으로는 얼마나 돈을 벌든 만족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오늘 20%가 올라서 팔아치운 주식이 내일 21%가 되어 있으면 분통 터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비교 대상이 있는 한 사람은 얼마를 벌어도 만족할 수 없다. 서툴게 돈을 잃어가며 주식을 배웠다. 꾸준히 수익을 내며 월급에 보태며 사는 삶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근로소득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테니 어쩌겠는가.


서른 살의 나는 주식은 계속 시도하겠지만 고기만큼은 언젠가 끊을 것이라며 스무 살 나를 제 시간대로 돌려보내는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은 남의 돈을 먹는 도박장이 아니라 작은 자본가로서 사회의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자리이다. 주식을 사고파는 일이 일희일비하는 사람의 본성에 반하긴 하지만, 관련 지식을 쌓고 정신 수련하듯 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 내 것이었던( 또는 내 것일 수 있던) 돈을 잃어가며 정신을 단련하면 다시 고기를 끊을 결심을 할지도 모르겠다. 신념에 반하는 삶은 찜찜하기 때문이다. 사회도 10년 전보다 채식하기 좋아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보다 험난한 선비의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