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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Apr 06. 2020

이력 사이의 삶

우리 집에는 그림책이 딱 한 권 있다. 『어린이를 위한 종의 기원』이다. ‘생식’이나 ‘야생종’ 같은 말을 설명도 없이 쓰는 걸로 보아 ‘어린이’를 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책 뒷장에는 작가 약력이 있다. 저자인 사비나 라데바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에서 분자생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자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표지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


저자의 이력이 이상하다고 느낀 이유는 지금 내가 생물학 석사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분자생물학이든 『종의 기원』이든 비슷한 생물학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둘은 삼국지 게임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만큼 다르다('전쟁' 말고는 공통점이 없다). 짧은 전공 지식으로 작가의 약력을 해석하면 이렇다. 그는 첨단 과학을 다루는 세계 최고의 연구소에서 공부하다 박사 진학을 포기했다. 이후 그림을 배우더니 200년 전에 나온 과학 고전을 그림책으로 바꾸어 출간했다.


책 뒤에 있는 시베나 라데바의 약력


우리 집에는 『랩 걸』도 있다. 저자인 호프 자런의 약력은 화려하다. 과학 교수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미네소타 대학 졸업 후 조지아 공과대학과 존스홉킨스 대학에 재직했다. 지금은 하와이 대학교를 거쳐 오슬로 대학의 교수로 있다. 받은 상과 메달도 여럿이다. 약력만 읽으면 이런 괴물이 있나 싶다.


표지 출처 알라딘 (https://www.aladin.co.kr/)


『랩 걸』을 완독하면 저자의 이력이 다르게 읽힌다. 아버지가 일하던 학교는 어린 딸을 실험실에 데려와도 될 만큼 작은 전문대학이었다. 임용된 후에도 돈이 없어 실습실에서 연구 도구를 훔쳐오다가, 동료에게 줄 월급도 남지 않아 돈 주는 연구소를 찾아 옮겨 다녔다. 평생 밖에서는 성차별, 안으로는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자런이 과학자로 사는 이유는 식물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아내는 과정을 즐기기 때문이다.


웬만한 이력으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다. 책의 저자든 강연의 연사든 화려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사람이 흔한 세대에 이야기마저 넘쳐나는 정보화 세상이라 사람들의 이력에 인플레이션이 생겼다. 덕분에 취준생의 이력서마저 나이에 맞지 않는 업적으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졸업 후 하는 일마다 꼬였던 친구가 있다.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교수의 횡포에 한 학기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몇 해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사기업 취직을 준비할 때, 친구들이 함께 졸업 후의 공백을 어떻게 메꿀지 고민했다. 1년도 안 되는 대학원 이야기는 지우고, 공무원 수험 기간은 사기업 취직 동기로 꾸몄다. 말이 익숙해질 때까지 면접 연습을 봐주었다. 다행히 취업은 성공했다. 이제 그는 바깥에서는 대단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실수와 갈등으로 돌아가는 회사에서 자기 몫을 수습하며 일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약력의 행간에 있다. 마케팅과 자랑에 덮여 보이지 않는 시련과 우연이다. 친구는 공백의 3년 동안 노량진의 공시생 빌딩에 살았다. 다른 동네였다면 헬스장이 있었을 층에 '경찰공무원 체력 학원'이 있던 건물이었다. 친구는 기역 자 창문에 한강이 들어오는 높은 층 모서리 방에 살았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세 번째 해, 온 가족이 지방에서 올라와 딸이 사는 원룸에서 불꽃놀이를 보았다고 했다.


출처 visitseoul.net (http://korean.visitseoul.net/)


청자와 화자를 갈라놓는 부풀린 수탉 가슴 같은 자랑 대신,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삶에서 내린 선택과 선택이 낳은 결과를 듣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솔직해지지 않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어린이를 위한 종의 기원』 작가의 삶도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창의적인 일을 하기 위해 과학 연구를 그만두었다는’ 모순을 읽으며 연구실에서 숨도 제대로 못 쉬던 대학원생 여성을 떠올렸다. 졸업한 후에는 마침내 숨을 돌리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생물학을 선택했는지 돌아보았을 것이다. 그 끝에 종의 기원을 찾았을 것이고, 마침내 자신의 작품으로 바꾸어 세상에 내놓았다. 석사 마지막 학기에 화사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을 읽으며 언젠가는 내 과정도 끝나리라 위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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