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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Apr 08. 2020

나의 시위 편력기

시위에 나가기를 좋아했다. 정치적인 뜻은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같은 말을 외치다 보면 거대한 시스템을 흔들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항쟁이 실패한 도시에서 자라며 전교조 선생님들과 가까웠던 이유도 있겠다. 처음으로 참여한 시위는 광우병 시위였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촛불을 들었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대신 시위자들이 거짓 정보에 속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내 나름대로 진실을 알고 싶어 찾은 책이 피터 싱어의 <죽음의 밥상>이었다. 광우병의 진위는 알 수 없어도 공장식 축산 시설에서 소와 돼지가 죽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세상을 바꾸는 대신 나를 바꾸었다. 그렇게 시작한 채식을 3년쯤 하다 대학생이 되며 그만두었다.


대학에 입학한 해 처음으로 광화문 광장 시위에 갔다. 과 선배이기도 했던 농대 학생 회장은 학생이 농민과 연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 사람들과 함께 FTA 수정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밤이 깊어 집에 가려는데 살수차가 지하철역을 막고 있었다. 물웅덩이를 찰박대며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호텔을 거쳐서야 지하철 역에 다다랐다. 내가 살던 도시를 자랑하자면 경찰은 집회가 있는 날 교통을 통제하고 시위대를 보호했다. 서울 경찰은 시위대를 구석에 몰고서 밀치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다시는 서울 시위에 나가지 말자고 생각했다. FTA 수정안은 반영되었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느끼지 못했다. 슈퍼에서 과일 하나 사 먹을 줄 몰랐던 때였다.


학교 안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당시 학교에 있던 학생은 누구나 알던 의제였다. 어느 늦은 오후에 학교 광장에서 전교생을 상대로 투쟁 찬반 투표가 열렸다. 해가 저물자 학생회는 압도적인 찬성표를 등에 업고 학교 본관 지하 문을 빠루로 열어젖혔다. 이후 며칠간 학생들이 학교 본부를 차지했다. 총장과 교직원들은 업무를 볼 다른 건물을 찾아야 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 본관에서 시간을 때웠다. 학생이 자리를 지켜야 직원들이 본관을 되찾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총학생회는 본부 점거를 지속하기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총장실을 단체 관람하며 고풍스러운 지구본과 비밀 통로를 구경했다. 밤에 본관 건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어느 교수의 신탁통치 오보 사건 강의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종강이 가까워지며 학생들이 줄어들었다. 화력이 줄자 본관도 빼앗기고 안건도 통과되었다. 학교 이름이 바뀔 만큼 큰 일이었는데도 학생 생활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의제로 학생들이 본관을 점거하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참여는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몇 번 시위에 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시들해졌다. 졸업을 앞두고는 세상 일보다 내 갈 길이 급했고, 회사를 들어간 뒤에는 시위를 가지 않았다. 핑계는 역사였다. 근현대사에 시민운동이 성공한 적이 없었다. 3년에 한 번씩은 내가 살던 도시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다. 영화는 항상 총소리와 검은 화면으로 막을 내렸다. 세상은 내가 누구와 연대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바뀌지 않는다.


내 판단이 항상 옳았는지도 자신이 없었다. 우리 사회의 한 축이 민주주의라면 다른 축은 자본주의였다. 이익이 갈리는 사회에서 연대란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동시에 다른 쪽을 버리는 일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선택지는 편했다.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 선택을 후회할 책임도 없어진다. 어차피 내가 행동하든 행동하지 않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불편하지 않았다. 세상을 상수라고 학습한 덕분이었다. 나에게도 듣는 사람 입에서 욕설 섞인 공감이 나올만한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순간이든 선택을 잘못한 나 자신을 탓했다. 제도를 불평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탄핵이 성공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광화문에 가기는 했다. 여전히 불가능한 성공을 꿈꾸는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딸 보러 올라온 엄마를 데려갔다. 사람들이 길을 사이로 둔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일이 지나며 광화문 광장을 둘러싼 왕복 10차선 부근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즈음 희생자의 유해를 찾지 못한 세월호 유가족분이 무대에 올라오셨다. 몇 년 동안 외면했던 목소리를 그날 밤 들었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다 광역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탄핵 당일 회사에 무한도전 김태호 피디가 왔었다. 모두가 김태호 피디를 보러 갔을 때 사무실에 남아 핸드폰으로 헌법재판소 판결을 보았다. 판결은 문장마다 무죄로 끝났다. 이럴 줄 알았다며 카카오톡으로 언니와 대화를 했다. 20분이 지나고서야 전원 동의로 대통령을 파면한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을 들고 놔주지 않는 구성이 판결문 치고는 극적이었다. 탄핵 후로도 광화문에서는 계속 집회를 열었다. 주말 시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축 집회에서 촛불 대신 불꽃을 쏘았다.


과학은 딱 하나의 반증만 있어도 이론이 뒤집힌다. 역사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증거를 얻었다.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의 기억이 살아있는 한, 과거의 무기력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 세상을 변수로 받아들이니, 어려움도 내 탓만은 아니었다. 인권의 범위는 넓어질 것이다. 운동장의 기울어진 각도도, 사각지대에 놓인 소수자도 줄어들 것이다. 나를 둘러싼 제도도 점점 견고해질 것이다. 사회에서 한 번 실수했다고 삶이 끝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한스 로슬링은 <팩트풀니스>에서 세상은 나쁘지만 동시에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이 멈춰 보여도, 뒤쳐지거나 거꾸로 가는 양 보이더라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다만 조급할 필요는 있다. 변화는 움직일수록 빨리 오기 때문이다. 세상에 가져야 할 마음은 낙관적인 조급함이다.



채식을 그만둔 이야기는 https://brunch.co.kr/@playkids5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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