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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캬닥이 May 10. 2020

초보 운전 숙련기

매번 뒷좌석에 타던 아이가 핸들을 돌리는 어른이 되기까지

아빠는 전세버스 기사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터 운전을 업으로 삼으셨다. 고등학생 때는 아빠의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아빠는 나보다 일찍 출근해 나를 태웠다. 하굣길에는 나를 내려주고 한참 후에 집에 돌아오셨다. 그래서인지 운전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보였다. 회사에 들어가고, 아빠만큼 월급을 받으면서도 느낌만큼은 여전했다. 나이가 비슷한 회사 동료들이 저마다 차를 몰고 다니는 모습은 영 어색했다.


내년에 근교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 슬슬 운전을 준비할 시기가 왔다. 4년 전에 딴 면허는 잃어버린 주민등록증의 대체품이 된 지 오래였다. 사람이 오지 않는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서 빙빙 도는 것부터 시작했다. 회전할 때마다 근처 차를 스칠까봐 조수석에 탄 반려가 절절맸다. 연구를 쉬는 동안 도로 연수를 받았다. 노란색 차를 타고 안양에서 신촌까지 수도권을 가로질렀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엄두도 못 낼 코스다. 연수가 끝나고 주차장을 맴도는 실력으로 돌아왔지만, 그래도 다음 코스로 넘어갈 단계는 되었다.


이후로는 10분짜리 출근길을 운전하며 경험을 늘렸다. 우리 부부는 시아버지가 몰던 오래된 SM5를 쓰고 있었다. 원래는 반려가 운전을 하고 내가 조수석에 앉았는데, 점차 내가 운전을 하고 그가 조수석에 앉는 횟수가 많아졌다. 집 차는 도로 연수용 차와 달라서 조수석 브레이크도 없고, 내 잘못을 너그럽게 수습할 전문 강사도 없었다. 반려는 자신이 운전할 때보다 훨씬 불안해했다. 10분이 안 되는 시간 동안 말이 짧아지고 상처를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그가 옆에 있던 덕분에 운전에 점차 익숙해졌다. 


그러다가 사고를 냈다. 주말에 운전하다 갓길에 주차된 차를 건드렸다. 뒤따르던 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처음 낸 사고에 정차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모범생처럼 항상 가던 길로 얌전히 집에 갔다가 차를 세워두고 헐레벌떡 사고 지점으로 갔다. 차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마음은 이미 뺑소니범이 된 나를 반려가 구해주었다. 우리 차가 망가진 부분을 보아 반대편 차는 티도 안 날 거라며 위로했다. 인터넷에서 '자진 신고'란 걸 찾아 알려주기도 했다.


집 근처 경찰서에 가서 교통사고를 냈다며 횡설수설하니 구석에 있던 서류철을 주었다. 기록도 남지 않는 자진 신고 서류 더미였다. 앞선 사람 글을 참고해서 쓰라고서 일을 하러 돌아갔다. 표에는 나 같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 자리 위칸에는 사람을 살짝 쳤는데 화만 내고 가버렸다는 사연이 적혀 있었다. 먼저번 사람들의 사건을 읽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행히 우리 차에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인생 최초 뺑소니 사건도 운전 초반에 겪는 작은 일화로 끝났다(내 사고는 뺑소니는 아니다. 사고로 다친 사람을 조치하지 않고 도망쳐야 뺑소니다.). 


결혼식 즈음 아빠 차를 바꾸라고 용돈을 드렸다. 나로서도 큰 결정이었지만 지금까지 아빠에게 여행 한 번, 선물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미안함이 컸다. 부모님은 무슨 차를 살지 한참 고민하셨다. 마침 코로나 사태로 개별소비세가 줄어들어 차를 바꾸셨다. 어제는 두 분이 새 차를 타고 서울로 오셨다. 지하주차장에 내려가 새 차 운전석에 앉아보았다. 요즘 차는 운전하기 훨씬 편했다. 핸들이 가볍고 카메라도 여러 곳에 달려 부딪칠 일이 없었다. 차를 빼서 건너편 주차칸에 넣었다. 아빠는 주차를 하는 내가 못내 신기했던지 차를 꺼내 또 주차해보라고 하셨다. 사방을 보여주는 화면을 보며 후진 한 번에 차를 넣었다. 이 정도 차면 나도 운전할 수 있겠다고 으스대며 차에서 나왔다.


집에 돌아와 손을 씻는데 아빠가 내가 아빠보다 주차를 더 잘한다고, 당신이 죽으면 차를 가져가라고 하셨다. 차를 받은 날 전화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직접 들으니 기분이 더 좋지 않았다. 이 차도 저번 차처럼 20년 타고 폐차해야지 무슨 소리를 하냐고 타박을 주었다. 너무 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셨을까. 그래서 차를 빌려서 탄다고 생각하고 싶으신 걸까. 아니면 내가 아빠의 새 차가 좋다고 너무 떠벌댄 탓일까.


아빠가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얼른 차를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사는 내년 일이고, 당장은 돈도 새 차를 몰 실력도 없다. 그러니 지금은 오래된 SM5로 운전 경험을 쌓을 단계다. 그래야 내년 즈음 두려움 없이 차를 운전하며, 고향에 내려가 아빠에게 새로 뽑은 차 자랑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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