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말랑말랑한 사람이니?"
누구에게나 매끄럽게 다가가 오독오독 식감을 더해주는 사람
아침에 싸준 햄버거를 그대로 남기고 온 아이의
도시락을 보는 순간 짜증이 확 밀려왔다.
“왜 안 먹었어?
”빵이 너무 축축해져서 못 먹었어 “
나는 햄버거를 만들 때 양상추를 빵 맨 밑에 깔고
두툼한 쇠고기 패티를 넣기 전에 채 썬 당근과 오이를 넣는다.
그래도 아이가 한입 먹고 뱉지 않을 만한 가장 무난한 채소들을 골라 넣었다고 생각했다.
뭐가 문제였지. 잠시 기억을 아침으로 옮겨보았다.
체에 밭친 후 물기를 탁탁 턴 후 키친 타올로 한번
더 닦아준 양상추는 아니다.
빵 바로 위에 올리는 부위라 나름 신경을 많이 썼다.
당근은 두말하나 마나... 그냥 개는 딱딱한 갑옷이다.
"그럼.. 오이?... 오이도 딱딱하지 않나"
아, 그때, 오이를 반으로 잘랐을 때 흐물흐물 거리는
속살이 떠올랐다. 건강하게 쭉 뻗은 초록 오이의
겉표면과는 대조적으로 그 속은 한없이 연약한 씨를
품고 있다.
대부분 세다. 인상이 말투가 외모가 너무 세…….
이런 친구들은 첫인상의 강력함과는 다르게
알면 알수록 여린 속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오이처럼 연한 속살을 보호하기 위해 겉모습은
단단한 표면으로 둘러싸놓은 것처럼...
나는 잠시, 물기를 한가득 머물고 있어 항상 축축 처진 게네들을 도려내지 않고 빵 사이에 그대로 넣은 것이 떠올랐다.
만약 오이를 빵 속이 아니라 비빔면이나 냉면에
고명처럼 얹었다면 오이는 속살까지 그대로 꼭 필요한 존재,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입맛을 돋구었을 것이다.
그저 빵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어릴 적, 나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을 가까이 두었다.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관계가 뚝뚝 잘려나갔다.
그건 성격이나 취향과 같은 공통분모를 형성했는데..
문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꼭 만나야 하는 관계에서 왔다.
알면 알수록 또다시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양파 같은 사람, 어디에도 두루두루 잘 어울리지만,
한입 깨어 물면 알싸함이 톡 쏘는 마늘 같은 사람.
굳이 없어도 되지만 어쩐지 허전해 가끔 생각나는
매운고추 같은 사람. 사람들에 둘러싸여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지만, 혼자는 절대 살지 못하는 쌈장 같은 사람.
얼마나 많은 성격의 사람들과 뒤섞여 사회생활을 했을까.
뒤범벅된 솥단지에 엉켜 설켜 사는 나는 가끔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나 회사 가는 게 즐거웠고,
어떤 때는 일은 기똥차게 잘 해내는 팀이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핏기 없는
하루하루를 버텨내야했다.
지금 와 문득 ...
어쩜 그들은 나와 다른 생각으로 그 공간을
회상하진 않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가령 오이 같은 나는 빵 같은 그를 만나 흐물거리는
내 속을 다 깠는데... 그 사람은 매일 축축 처져 집으로 힘없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내가 빵 같은 그의 삶에 조금씩 스며들어 얼마나
그를 무겁게 했을까.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이 사실은
나를 참아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쓸쓸함이 밀려왔다.
어떤 사람들은 상대와 맞지 않는 부위를 과감히
도려내고 또는 잠시 멈추어 상대의 말에 귀 기울여준다.
고집스럽거나 너무 단단해 뚝뚝 부러지는 결말만을
향해 가는 사람들과는 결이 다른 것이다.
말랑말랑한 무엇, 흐물흐물 거리는 무엇이 그 사람을
많은 사람들과 조화롭게 한다.
잘 맞는 사람만 내 곁에 둔다면 나는 언젠가 우주에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이밀며...
내 색깔은 잃지 않으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어쩌면 간단하다.
오이는 속살을 도려내 단단함만을 남기고 양파는
물속에 잠시 담가 뒀다 꺼내 매콤함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도 오이는 오이고 양파는 양파다.
나도 조금은 말랑말랑하고 유연해서 누구에게나
매끄럽게 다가가 오독오독 식감을 더해주는 사람이고 싶다.
나는 하루 종일 굶었을 아이를 생각해 한동안 햄버거를 도시락으로 싸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이의 속살을 걷어내고 딱딱한 겉면만
채 썰어 빵 사이에 넣어 보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여느 때와 같이 도시락 가방을
식탁에 획 던지고 방으로 뛰어갔다.
자꾸 작아지는 그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다 먹었어?
"응, 오늘은 맛있었어"
나도 모르게 스르르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