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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별빛 Dec 07. 2020

"보고 싶다. 우리 딸"

손발 오글거려도 이제 마음을 그만 아끼자. 엄마!

엄마가 어릴 때 사진들을 두서없이 쭉 보내왔다.
이민 간 하나뿐인 딸을 걱정하는 당부나 안부의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옛날 사진이니 한번 보라는 말만

툭 남겼다.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니 뭐 별다를 거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봤다.
 
저 맨 끝, 눈에 띄지 않는 그곳에

“보고 싶다. 우리 딸” 이렇게 한 줄이 덜렁 매달려 있었다.
 

내가 결혼한 날도 엄마는 이제 마지막 숙제를 해결했다고 홀가분해했고, 무거운 이민가방을 끌고 호주로 가던 공항에서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그냥 "잘 살아라" 옆집 둘째 딸내미 대하듯 인사치레 같은 것만을 남겼을 뿐이다.


엄마는 애초 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는 게 고단해 웃음을 잃은 지 오래였고 항상 지쳐 보였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거나 엄마에게 다정함을 갈망하는 대신 따로국밥이 되기로 했다. 철저히 내 인생, 엄마 인생, 오빠 인생, 우리 가족은 한 울타리 안에서 각자 개인 방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엄마의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오빠의 아이를 키워주면서?
노인 동호회에서 사이클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니면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는 꿈을 키우면서부터일까
엄마는 그렇게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내가 기억하던 웃음을 되찾고 있었다.






양화대교 에서 막내 이모에게 전화했다고 엄마는 술기운을 빌어 말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뛰어내리려고 했어. 다 버리고 뛰어내리려고….

" 근데 너희가 눈에 밟혀서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실제로 보지 못한 그 장면이 마치 영화에서 본 듯,

혹은 꿈에서 본 듯, 내 머릿속에 너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빠가 남겨준 집, 그것마저 잃으면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을까? 마침, 잘못 만난 건축업자 때문에 공사 중인 이층 집이 문제였을까.
까마득하다. 고작 중학교 2학년인 내가 감당하기엔

엄마는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종이에 그렇게나 많은 숫자를 한꺼번에 본 것도, 그게 사기 피해자들에 대한 법정 출두 소장이었던 것도...


나는 그저 가슴이 쿵 쿵….
 
자꾸만 커다란 주먹이 한 번씩 크게 펀치를 내리꽂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날들 속에 엄마는 푹 꺼진 고무풍선처럼 힘없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고작 마흔셋. 지금 내 나이에 엄마는 너무 큰 짐을 혼자 외롭게 짊어져야 했다.
 
하루아침에 날벼락같았던 아빠의 죽음 또한 엄마의 삶에 예견된 불행은 아니었다. 통곡도 조금의 여유가 허락된 후에 토해낼 수 있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그저 멍하고 핏기 없는 얼굴, 눈물도 메말라 건조하게 말라가던 그때였나 보다.
 
무덤가에 넋 놓고 앉아있던 엄마 앞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고 했다. 가만히 엄마 주변을 한참을 맴돌다 슬픈 눈을 하고 떠났다 했다.
밥상에 둘러앉아 라면을 후루룩 먹고 있는 초등학생인 오빠와 나에게 엄마는 그 나비가 아빠인 거 같다고

덤덤히 말했다.
 





아빠의 장례가 끝나고 집에 찾아온 할머니가 엄마를 부여잡고 아이처럼 울었다. 다 큰 어른이 울음은 마치 새끼를 잃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 고통을 나눠야 할 것 같아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머리를 하고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던 친할머니는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다. 흡사 불독같은 주름이 얼굴 곳곳에 인상으로 베어 번에 강한 여장부임을 알 수 있게 했다.


집안 대소사는 물론 작은 아빠든 큰 아빠든 내가 보기에

아주 큰 어른들을 호되게 야단치는 모습은 명절이나 추석 때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풍경이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그저 멀찍이 앉아 말총처럼 생긴

얇은 수염을 손으로 정성스레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삐쩍 마른 할아버지가 허허 사람 좋은 웃음으로 비틀거리며 걸을 때마다 옆에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흐뭇해하셨다.
 
딸보다는 아들 손주를  대놓고 편애하는 할머니가

무서워 나는 가까이 가지 못했다.
삐쭉 고개만 내민 채 엄마 치마폭에 숨어 눈치보기 일쑤였다.
 
할머니에게 아빠는 할아버지보다 자신을 빼다 닮아 영특하고 화통한 사내대장부이며, 석유사업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운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4남 2녀 중 유독 사랑했던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잃자 할머니는 무너졌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할머니가 작고 가냘프게 느껴졌다. 아무렇게나 이마에 붙어 휘날리는 흰머리가 한없이 가여웠다.
 
나는 거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그 고통의 울음을 들으며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오히려 경직된 건 친구들이었다. “괜찮아?”라는 위로의 말이 그 어린 나이에도 상처인가 가늠할 정도로 아빠의 죽음은 그랬다.


 나는 아무렇지 않고 싶었다.
 
나만 괜찮으면 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난 평범해질 수 있다고, 날 동정하지 말라고,

더 당당히 허리를 펴고 걸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슬퍼하지 않을 거야”라는 나의 다부진 마음속엔 이미 나는 아빠 없는 아이로,

평범한 범주에서 아웃됐다는 현실이 놓여있었다.


86년도, 남자라는 성별은 그 하나만으로 힘이고 권력이

되던 시절이었다. 여자는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고 과부나 미망인 정도로 불리던 지금의 싱글맘은 더욱 설 자리가 없었다.

더구나 엄마는 강하지도 영리하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엄마는 2년간 자잘한 부업을 하며 집에서 지냈다.






다다다다다 뛰어가면 금세 골목길 끝에 서있을 거 같았다.
숨 가쁘게 지나오면 나는 크고 우리는 그렇게 평범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이민을 결심한 건 아니었다.
나는 모든 걸 아빠에게 의지해 살아온 엄마가 갑자기 생계부양자가 됐을 때의 막막함을 기억한다.

그 선연하게 박제된 기억 한 줄이 나를 자기 주도적 성향으로 자라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조금은 이기적으로 나를 위한 삶을 지향하며 하고 싶은 건 하고야 마는 고집스러운 아이가 되었다.
 
엄마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한 번도 막지 않았다.
내가 예고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내가 호주로 이민 가겠다고 했을 때도 그 흔한 선 자리 한 번 주선하지 않고, 독신주의자라는 내 말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지지해준 것은 무관심의 한 방법이었다.
지친 엄마의 삶에 딸의 삶까지 품어줄 마음의 여유가 엄마는 없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두 번의 산후조리를 해주러 호주에 왔을 때도 엄마는 날짜를 세어가며 모질게 한국에 가고 싶어 했다. 나를 품어줄 수 없으니 내 아이들도 당연 품어줄 수 없는 것 같았다.
 
엄마와 연락을 끊었다.


엄마의 사랑이 내 밑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게 가슴 아팠고,
나는 또 한 번 사랑받고 자란 평범한 어른이 되지 못한 현실로부터 아웃당한 것 같았다.

그 평범이라는 범주는 항상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육아 전쟁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엄마와 연락을 끊은 지 두 해 정도 지났을 때, 화해의 손길은 아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엄마가 외할아버지 유산을 받게 되면서 대뜸 돈을 준다는 전화였다. 애써 분노를 꾹 참는 어조로 엄마가 말했다.
 
“ 너는 미워도 그래도 딸이니까 오빠랑 반반씩 나눠 준다" 

 "계좌번호 불러” 


그 오랜 미움이 서운한 감정을 모두 삼키고 나는


 “고마워, 엄마” 했다.


어떻게 가 나에게…. 라는 괘씸한 마음이 그래도 딸이니까 라는 끊을 수 없는 핏줄을 앞세워 엄마는 내게 먼저 연락했다고 했다.


왜 그랬냐는 기본적인 변명조차 생략된 채,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게 아닌 깊은 원망을 품은 채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내가 전화하기 전에는 먼저 연락하지 않던 엄마가
가끔 얼굴 없는 들풀 사진이나 흐트러지게 피어오른

벚꽃 사진을 보내온다.


" 이쁘지? 이제 한국은 봄이다"
 
단풍이 붉게 물든 빼곡한 가로수길 사진을 보내곤


"이쁘지? 이제 한국은 가을이야 "


그게 우리의 안부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칠순 생일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예쁜 꽃에 숨어 궁금함을 전하지 않고,

엄마는 나를 똑바로 보고 진한 그리움을 말하기 시작했다.
 
“잘 지내라”

 ”거기서도 행복해라 “

”보고 싶다 “ 

 ”고맙다 “
 
절대 만나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편지처럼 먼 곳으로 날아와 둥둥 떠오른다. 가장 가까이 우리 관계를 지켜본 신랑만이 걱정스레 묻는다.
 
“ 장모님, 괜찮으시지? 어디 아픈 데 있으신 거 아니지? ”한번 전화해봐 “
 
지금 내가 받은 이 문자 한 줄이 엄마가 내게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될까 봐 우리는 가슴이 철렁한다.
어쩌면 엄마는 나보다 먼저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사랑을 나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조금 민망하고 손발 오글거려도 이제 마음을 그만 아끼자고, 사랑하는  딸에게 후하게 퍽퍽 퍼 나르자고….
 
나는 아직 그 사랑에 익숙지가 않다.

여전히 내 서툰 감정은 엄마를 향해 다가가지 못한다.

 

다만,

코로나가 종식되어 한국에 갈 수 있는 날,

엄마의 작은 어깨를 한번 꽉 안아볼 수 있기를

나는 진심을 다해 마음에게 빌어본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말이
엄마에게 전하는 나의 마지막 말로 남을 수 있게….

나는 오늘도 마음에게 한발 더 다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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