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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Apr 12. 2024

해리포터 스튜디오를 가기 위해 두 달간 아이가 한 일

세상에서 제일 비싼 독서

여행의 시작은 비행기표를 결제하는 순간부터다. 작년 3월에, 5월 21일 영국으로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여름 겨울 휴가가 따로 없는 아빠가 시간을 낼 수 있는 때가 그때뿐이었다. 아이가 한 달여의 시간을 학교를 빠지는 거라 부담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무시무시한 사춘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터라, 아직 말랑말랑할 때 많이 돌아다녀야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학교에서의 학습이나 생활태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여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긴 여행동안 읽힐 책을 뭘 가져가나 고민이 되었지만 아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미뤄두었다.


도서관에서 가이드북을 빌려 아이에게도 건네주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읽어보고 표시해 놓으라고 했다. 아이는 영국에서 가장 가고 싶은 곳이 해리포터 스튜디오라고 했다. 그 당시 해리포터 1권을 읽고 영화도 보고, 점점 그 재미에 빠져들던 중이었다. 여행준비로 분주한 엄마를 보며 아이도 스스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4월, 아이가 목표를 세웠다.

"엄마! 나 해리포터 스튜디오 가기 전까지 해리포터 다 읽을래. 다 사줘."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에 2권부터 7권까지 다 읽겠다니 무리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지만,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해 보겠다는 아이가 대견했다. 되든 안되든 지지해 주기로 했다. 엄마표 영어를 한다고는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책을 찾아서 가져다주는 일이 귀찮아져서 아이는 영어책과 멀어져 가고 있었다. 뭐라도 시켜야겠어서 임시방편으로 영어도서관에 등록해 일주일에 두 번 책을 듣고 왔다. 그러던 아이가 해리포터는 재밌게 읽는 걸 보고, 다시 불이 붙으려나 하던 참이었다. 해리포터를 다 읽으려면 영어도서관을 다니면서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아이의 말에 영어도서관도 쉬기로 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아이니 어떻게든 최선을 다할 거라 믿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저 내용을 다 이해나 하는 걸까? 나중에 하나도 기억 못 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이 가득이었다. 그러다 아이가 책에 빠져들어 읽는 모습을 보고는, 모르면 뭐 어때? 하는 생각으로 바뀌어 갔다. 나중에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읽었다는 것 자체로 아이에게 크나큰 성취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이었다.  


목표의식이 생기자, 아이는 하루에 적어도 몇 쪽은 읽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목표지향적인 아이의 성향이 빛을 발하는 순간. 매일 무슨 일이 있어도 해리포터 읽는 것은 빠뜨리지 않았다. 쉴 때는 해리포터 영화를 보여달라고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딜 가든 두꺼운 책을 펼치는 아이 모습만 봐도 뿌듯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나도 못 읽는 저 두꺼운 영어책을 읽고 있는 아이가, 내가 낳은 아이요!!



여행 가기 며칠 전, 아이는 아직 7권을 못 읽었다며 울상이었다. 다섯 권을 다 읽은 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하다고, 누구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 거라며 아이를 위로했다. 스스로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아 속상해하던 아이는 엄마의 위로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시간에 해리포터를 읽기로 작정했다. 영국 가는 비행기에서도 영화 보는 시간, 기내식 먹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엔 다 해리포터를 읽었다. 영국에 도착해서도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새벽부터 일어난 아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역시 해리포터 읽기였다. 여행을 하는 내내 어딜 가나 그 두꺼운 책을 들고 다녔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계속 끼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 관광지 구경을 하다가도 해리포터, 마켓에서 뭘 사 먹다가도 해리포터. 버스에서 처음 보는 영국 할머니들이 눈이 휘둥그레 해지며 아이를 보고 칭찬했다.

"어이구 기특해라. 요즘 애들은 스마트폰 보느라 다들 정신이 없는데, 얘는 책을 읽네요."

책 읽느라 할머니들에게 눈길도 안주는 아이를 보고서도 할머니들은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쌍따봉을 날려주시며 대단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셨다. 짧은 영어로 땡큐땡큐 말씀드리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책 읽는 아이에 대한 할머니들의 칭찬은 만국 공통이다.  


대망의 그 날이 밝았다. 둘째 날이나 셋째 날 가려고 했던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읽기가 마무리되어 가는 넷째 날이 되어서야 갈 수 있었다. 그곳에 가기 전 버킹엄 궁전 앞에서 대관식을 기다리면서도 아이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몇 쪽 남지 않은 책의 마무리를 기어이 할 작정이었다. 가는 버스에서까지 책을 읽고 또 읽던 아이는 마침내 전권을 다 읽었다. 읽어냈다고 하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넌 수불석권의 대명사야. 두 달의 대장정을 무사히 마친 아이에게 박수를 보낸다.


남편은 대견한 아이에게 선물을 사주겠다며 기념품샵에서 뭔가를 고르라고 했다. 좀처럼 즉흥적으로 잘 안 사주는 남편인데, 아이의 가상한 노력에는 보상을 해주고 싶었나 보다. 여기는 해리포터 덕후들이 정말 많아서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신이 나 구경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다. 기념품샵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기념품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영화 세트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해리포터 코스튬을 입은 사람들이 지척의 여기저기서 마법의 주문을 외운다. 아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법의 지팡이를 골랐다. 웅가르디움 레비오사! 하나하나 살펴보고 고심해서 고른 예쁘고 비싸고 (쓸데없는) 지팡이. 남편도 하나 사서 아이와 마법 대결을 하겠다는 것을 말리며, 공원에서 나무 막대기를 주워다주마 약속했다. 여보, 당신은 해리포터 다 안읽었잖아요. 아들들을 다 키우려면 아직 멀었구나 싶다.


돌아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외국인 아이들이 모두 다 각기 다른 종류의 마법의 지팡이를 갖고 있는 걸 보았다. 아빠들은 어떻게든 한 번씩 뺏어서 휘둘러보고, 엄마들은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당했구나 하는 표정. 나라와 인종을 넘어 전 세계가 하나 되는 풍경에 이래서 지구촌이라고 하나보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아이는 처음 보는 아이들과 마법 대결을 신나게 하며 마법의 지팡이를 고른 것에 크나큰 만족감을 느꼈다. 해리포터를 읽음으로써 머리에 남는 게 없으면 어떤가. 마법의 주문을 외우고 마법 대결을 하면 되지. 이런 게 바로 독후활동 아니던가. 해리포터 스튜디오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내 아이 같은 아이를 하루에 백 명은 볼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사버린 지팡이를 활용하려면 매일 여기 문 앞에 지팡이 들고 서있어야겠네.



해리포터를 읽은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스스로 목표를 정해서 읽을 때까지만 해도 영어는 걱정 없겠다며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소리를 했었다. 해리포터에 대한 몰입이 끝나자, 아이는 굼벵이 같은 본연의 모습으로 금세 되돌아왔다. 뭐든 느릿느릿, 천천히.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반응속도가 늦다. 일 년 중 한두 달이었지만 몰입의 순간을 보고 아이의 저력을 잠시나마 느꼈던 그때가 꿈을 꾼 듯 아득하다. 목표만 잘 설정되면 나보다도 훨씬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아이라 믿음을 가져보려 하지만, 늘 불안은 함께한다. 몰입이 죽 이어지면 좋으련만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아이의 자율성이 스스로를 크게 만들겠지, 그런데 그 자율성을 어떻게 이끌어준담. 이번엔 어떤 미끼를 던져봐야 하나. 하루종일 종이접기를 하고 있는 아이 옆에서 또 다른 몰입의 순간을 기다리는 오늘도 엄마의 고민만 깊어져간다. 만약 그 순간이 또 찾아온다면 이번엔 수학이 어떨까 혼자 소리없는 마법의 주문을 외워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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