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생일선물을 꿀꺽해버렸다
프랑스는 미식의 나라다. 온갖 소스가 발달해 있다. 미슐랭 가이드도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했다. 프랑스 코스요리는 3코스부터 시작해서 5코스, 7코스 각자의 음식 취향이나 위장 크기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주문할 수 있다.(짧게는 2코스도 주문할 수 있다.) 와인을 좋아한다면 와인 페어링도 가능하다. 코스마다 다른 와인을 시켜 음식과 곁들여 먹을 수 있다. 식전주, 본음식과 어울리는 와인, 디저트 와인. 와인 센스를 장착한 서버가 있는 레스토랑에 가면, 음식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와인을 내온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르는 나와 남편도 음식과 딱 맞는 서버의 추천 와인을 함께 먹고 있으면 환상의 나라에 온 듯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곳은 위험하다. 특히나 술이 약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본인의 주량을 생각하지 않고 마시다 보면, 어느새 고주망태가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남편은 와인 한잔에도 곤드레만드레 취할 수 있는 사람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빨개지며 눈이 풀린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그가 내딛는 모든 걸음에서조차 알코올향이 묻어난다.
프랑스 디종에 갔던 날이다. 여긴 분명 평이 좋은 맛있는 코스요리 음식점이 있을 거라며,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남편이 말했다. 디종 머스터드로 유명한 곳이니, 그걸 활용한 요리가 발달하지 않았겠냐는 논리다. 사실 꼭 뭘로 유명하지 않아도 프랑스 전역에 맛있는 곳은 널려있긴 했다. 한참 공을 들여 평이 좋은 맛있는 레스토랑을 찾아낸 남편은 저녁시간으로 예약을 했다. 날씨도 너무 좋아 노상에 펼쳐놓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를 담당한 말레이시안 웨이터는 배우 정승길 님을 똑 닮은 친근한 얼굴에, 영어도 위트도 영업력도 수준급이었다.
"식전주부터 한잔 하셔야죠?"
"그럼요. 한잔 주세요."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기가 무섭게 홀린 듯 식전주부터 주문했다. 뭘 앉자마자 술부터 시키냐는 나의 핀잔에 프랑스인들은 다 그렇게 한다며, 남편이 짐짓 거드름을 떨며 말했다. 마치 자신이 프랑스인이라도 된 양. 몸에서 술이라도 잘 받으면 흘겨보지라도 않지. 내일 일정도 없는데 뭐 어떠랴 식전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남편을 보니, 자포자기의 마음이 생긴다. 숙소까지 운전해서 갈 일이 험난하지만 그것도 내 팔자다. 메뉴를 보고 있는데 웨이터가 또 다가온다. 위험감지, 위험감지.
"남자라면 7코스죠."
"아, 뭐라는 거야. 7코스는 과해. 안돼."
"7코스는 좀 과한데요. 흠... 5코스로 할게요."
역시나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그의 말. 괜히 메인 웨이터가 아니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상인과 고객을 보는 것 같다. 원래 값보다 비싸게 불러서 깎아주는 게 흥정의 정석 아닌가. 7코스로 시작해 5코스로 깎아서 왠지 합리적으로 먹는 듯한 그런 주문. 이미 술 한잔 들어간 터라 내 남편은 아주 쉬운 손님이었다.
과하게 먹고 싶지 않았는데 자랑스럽게 홀랑 주문한 남편 덕에 5코스 요리를 먹게 되었다. 음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침을 꼴딱 삼키고 있는 남편이다. 적당히 좀 먹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그 말은 삼켜야 했다. 5코스면 음식 서빙되는데도 두 시간은 넘게 걸린다. 코스 요리는 성질 급한 한국인과는 안 맞다. 후다닥 뚝딱 먹고 일어나고 싶지만, 기다림의 미학을 실천해야 한다. 소화시키며 천천히 먹으라는 뜻인가 싶기도 하다. 심지어 남편은 와인 페어링까지 하겠다고 했다. 와인을 먼저 가져와 시음 후 와인을 따라주고, 음식은 다음에 서빙이 된다. 그 과정을 다섯 번 반복해야 한다. 세월아 네월아 어찌나 천천히 서빙이 되는지, 음식 기다리면서 나도 모르게 다리가 달달 떨리고 식전빵을 세 번도 넘게 리필해 먹었다.
와인을 마시다 보면 음식들은 안주가 된다. 안주삼아 먹는 음식들은 한없이 뱃속으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양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5코스면 식전빵을 제외하더라도 셋이서 15 접시의 음식을 먹는 거다. 평소 같으면 먹기 힘들었을 텐데 와인과 함께 하니 무한대로 음식이 들어간다. 와인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배가 부른 지도 잘 모르겠다. 사실 어느 테이블을 봐도 우리처럼 무식하게 음식을 시키는 테이블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2코스 정도로 짧고 가볍게 먹거나 혹은 둘이서 각각 한 접시의 메인 요리만 먹고 디저트 한 종류를 셰어 해서 나눠먹거나. 인당 5 접시씩 기어이 먹은 우리는 임산부처럼 커진 배를 부여잡고 숙소로 향했다. 7시 반에 시작한 식사는 10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밥 한번 먹기 이렇게 힘들어서야. 그래도 그날 기분 좋게, 맛있게 먹은 와인들의 맛은 우리의 기억에 깊이 각인되었다. 와인 이름이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는 게 함정이지만.
디종에서의 코스요리를 못 잊은 남편이, 본인의 생일에 프랑스를 그리워하며 프렌치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krug이라는 프랑스 샴페인을 알게 된 건 그곳에서다. 미리 알지 못해 얼마나 다행인지. krug은 비싸다. 한 잔에 87,000원. 생일이니까 한잔만, 딱 한잔만 하겠다는 남편에게 생일선물 대신 와인 한잔을 선물했다. 그런데 이 와인, 정말 맛있다. 내가 먹어본 것 중에 제일이다. 달지도 텁텁하지도 않고 산뜻함 그 자체. 아주 살짝 오크향이 스친 상큼함,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정체를 알고 싶어 진다. 와인을 잘 몰라서 내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면 소비뇽 블랑류의 화이트 와인만 주구장창 먹었었다. 그게 산뜻함의 정석인 줄 알았다. 하지만 krug을 먹어보고는 와인 맛의 세계가 새로 열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처음, 중간, 끝을 나눠 맛을 이야기하던데 경험 부족으로 표현이 비루하여 아쉽기만 하다.
krug은 샴페인의 왕이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다. 매년 달라지는 품질 편차를 최소화하기 위해, 10개 이상의 빈티지와 120여 개 이상의 베이스 와인을 블렌딩 하여 와인을 완성한다. 와인 숙성을 위해 4,000여 개의 오크통을 사용하고 테이스팅 커미티가 모여 300종의 베이스 와인을 테이스팅 하여 최적의 블렌딩을 찾는다. 하나의 edition을 만들 때마다 5,000여 개의 테이스팅 노트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블렌딩 이후 숙성기간에 따라 그랑 뀌베(6년), 빈티지(10년 이상), 리저브(최대 15년까지)로 나뉜다. 우리가 먹은 건 krug 그랑 뀌베. 병으로 구입한다면 30만 원 중반부터 시작이다.
한 잔 시킨 krug은 나의 뱃속으로 거의 다 들어갔다. 한 모금만 먹겠다고 해놓고, 나도 모르게 생일 선물을 꿀꺽 다 마셔버렸네. 그날만큼은 다른 와인이 양에 안찰 게 뻔해, 그 한 잔에 오롯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음식이 나오는 내내 왠지 아껴먹었고 한 방울도 남길 수가 없었다. krug을 남김없이 먹고 아쉬워하는 나를 보며 허탈해진 남편은, 진정으로 미각의 혀를 가진 사람은 바로 나일 거라고 한다. 지금껏 내가 와인을 많이 안 먹었던 이유는 맛있는 와인을 못찾아서라나?
대학교 2학년 때 사촌오빠 집에서 방학 동안 잠시 살았던 적이 있다. 오빠는 직장인이었고 술을 좋아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잘 마시는 대학생이었다. 오빠가 1박 2일로 놀러 간 어느 날, 친구를 불러서 같이 자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천사 같은 오빠는 집에 있는 맛있는 거 찾아서 많이 먹으라고도 했다. 친구랑 맥주나 한 잔 할까 하고 안주 찾으러 열어본 찬장에 영롱하게 빛이 나는 밸런타인 30년 산이 있었다. 그게 사실은 뭔지도 몰랐는데 친구가 엄청 맛있는 양주라고 했다. 양주는 얼음 넣어서 먹는 거라, 먹어도 먹어도 안 취한단다. 한 모금만 마셔볼까 하고 꺼냈는데, 한 모금이 한잔이 되고 한잔이 한 병이 되었다. 맛있어서 밤새 주거니 받거니 한 병을 다 마셔버렸다. 정말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야무지게 다 마셨다. 친구말이 맞았다. 신기하게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하나도 안 취했다. 이런 술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오빠 돌아왔을 때 찬장에 있던 술 다 마셨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변한 건 오빠의 얼굴색이었다.
한 유명한 맛집 유투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이 와인을 맛없다고 한 이유는 좋은 와인을 안 마셔봤기 때문이다." 그렇다, 맛있고 좋은 술은 바로 비싼 술이었던 것이다.